강해설교

욥기 강해설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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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1 16:12 조회5,6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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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첫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 “나를 과녁으로 삼고 활을 쏘시니”

<욥 6: 1-7: 21>

 

욥기 6장과 7장은 엘리바스의 발언에 대한 욥의 응답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엘리바스를 비롯한 친구들을 향하여(6: 1-30), 청중을 향하여(7: 1-6),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7: 7-21) 각각 대답합니다.

 

 

엘리바스의 말이 구구절절이 다 옳은 말이기는 했지만 욥이 겪고 있는 처절한 상황에 부합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여,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탄식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이론도 소용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원인 없는 결과가 없으며, 그 뿌린 씨앗대로 열매를 거두는 법인데 욥이 이렇게 고난 받는 이유가

다 죄 때문이니 빨리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라는 엘리바스의 충고는 욥을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죄 지은 사람에게 징벌을 주셔서 다시 바로 설 수 있도록 하신다는,

이른바 고난의 교육용 해석은 더더욱 욥의 형편에 맞지 않았습니다.

 이제 욥은 이러한 친구들과 하나님을 향하여 가슴 가득 찬 슬픔과 억울함을 절절히 토해내고 있습니다.

 

 

 

1. 이런 것들이 친구들이라고(6: 1-30)

 

 

 6장 말씀을 읽어보면 욥은 먼저 친구들을 향하여 자신의 결백과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욥을 과녁으로 삼고 마구 독화살을 쏘아대셔서 자신의 영혼이 그 독을 빨고 있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면서 5-7절에서는 자신의 입맛이 다 떨어졌다고 하소연합니다.

7절에 보면 그런 음식들은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며 냄새조차도 맡기 싫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고난에 처하면 제일 먼저 입맛부터 떨어집니다. 그래서 입맛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고난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지요.

욥이 당한 그 엄청난 재앙을 생각할 때 일체의 입맛이 떨어진 욥의 입장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8-13절에서 욥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9-10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자신을 부수시고 손을 들어 자기를 깨뜨려 주시면 그것이 오히려 위로가 되고,

이렇게 무자비한 고통 속에서도 그것이 오히려 자기에게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고난이 극심했으면 이런 말을 할까요? 동방의 의인으로서 순전한 믿음을 가졌던 욥이라고 해서 왜 감정이 없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가장 인간적이며 솔직한 욥의 진면목을 만나게 됩니다.

 

 

 14-30절 말씀은 친구들에 대한 욥의 서운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이미 가장 연장자요

지도급 위치에 있었던 엘리바스에게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는, 심문하고 정죄하는 충고를 들었습니다.

 

욥이 이런 말을 듣고 자기의 결백을 내세우며 격앙해서 외치는 말입니다.

이렇게 절망스런 상황 속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친구인데 친구라는 것들이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15절 말씀 이하에 보면 이 믿지 못할 친구들을 개울의 물살로 비유했습니다.

 

 

중동의 개울물이라는 것이 얼음이 녹으면 흙탕물이 흐르고 눈이 녹으면 물이 넘쳐흐르다가도 날이 더워지면 쉬 말라버리고 날이 뜨거워지면

 흔적조차도 없어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변화무쌍한 개울물에 기대를 걸지만 결국 나중에 낙심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욥은 그 당시 낙타를 타고 사막을 여행하는 대상(隊商)들이 실제로 개울물에 기대를 걸었다가 난감한 일을 당하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욥의 친구들이 이와 같이 변덕스럽고 믿지 못할 친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욥은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욥의 꼭대기에 서서 선생을 자처해서 전수받은 지혜와 지식, 경험 등을 총동원하여

욥의 고난을 해석하려 하고 심문하고 정죄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들이야말로 중동 지역의 개울물이 대상들을 실망시키고 배신하듯이 도무지 믿지 못할 무리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욥은 자신의 서운한 감정을 막 퍼붓습니다. 22-23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언제 너희에게 나를 공급하라 하더냐 언제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로 예물을 달라더냐 내가 언제 말하기를

 대적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포악한 자의 손에서 나를 구속하라 하더냐."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욥 자신이 친구들에게 뭘 요구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지요. 이거 내놓아라 저거 내놓아라 한 적도 없으며

친구들의 재산을 뚝 떼어서 목숨을 살려달라고 한 적도 없으며 원수나 폭군의 손에서 건져 달라고 구원을 요청한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느 하나라도 친구에게 신세 진 일이 없거늘 친구들은 함부로 욥을 심문하고 판단하는 것을 못내 섭섭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친구들에게 던진 욥의 폭탄선언과도 같은 결론이 27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고아라도 제비를 뽑아 노예로 넘기고, 이익을 챙길 일이라면 친구라도 서슴지 않고 팔아넘길 자들이다.”

 

 

이 말은 굉장히 과격한 말입니다. 욥 자신의 서운함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쳤으면 이런 말을 다 내뱉었겠습니까?

 자신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결백하다고 믿고 있는데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니

욥의 심기가 뒤틀려 버리게 된 것이지요!

 



 

 

2. 그 뒤척거렸던 불면의 밤이여(욥 7: 1-6)

 

 

 

 여러분,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여 밤새 뒤척거리며 새벽이 밝아 오기까지 잠 못 이룬 경험이 있으십니까?

이제 7: 1-6절은 욥이 그 대상을 친구들로부터 오늘 우리와 같은 일반 청중으로 바꾸어서 자신의 아픔을 호소합니다.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운 밤이었던지 눕기만 하면, 언제 깰까, 언제 날이 샐까 마음 졸이며 새벽까지 내내 뒤척거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무 소망도 없이 종말을 맞는 자신의 절망스러운 상황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3.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구나(7: 7-21)

 

 마침내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아픔을 토해 냅니다.

 적어도 욥 자신이 생각하기에 아무 잘못도 없이 무고하게 이 엄청난 고난을 당하는데 왜 이와 같은 고통을 주시는지 항의합니다.

11절을 보세요. 욥은 이제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지 분하고 괴로워서

 자기의 불평불만을 다 주님께 토로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할 때 이런 자세가 때로 필요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 우리는 가만히 침묵하고 묵종하는 것보다 때로 이와 같은 격렬한 항의를 통하여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습니다.

 

 

 15-16절 말씀을 보세요. "차라리 숨이라도 막혀 버리면 좋겠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살아 있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 나날이 허무할 따름입니다.”

 여기 보세요. 욥은 뼈만 앙상해서 살아있기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소연합니다.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에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나님께 절규하는 모습과 너무 닮지 않았습니까?

이제 20-21절 말씀을 보세요. 비록 욥이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면 될 터인데

왜 이렇게 과녁으로 삼아서 독화살을 쏘아 대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엘리바스의 첫 번째 발언에 대한 욥의 대응은 끝이 납니다.

 

 

 

4.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어떻게 돕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엘리바스를 비롯한 세 친구들은 욥에게 선생인 냥 욥의 고난을 해석하고 심문하는 형태의 우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와 같이 선생인척 하는 조언은 정말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참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만일 욥의 세 친구들이 욥과 비슷한 처절한 고난을 당해 본 경험이 있었다면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지혜 전승이라는 전통적인 입장, 제 3자라는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에서 욥의 고난을 해석하고 설교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좋은 친구들이 극심한 고난을 겪고 있었을 때, 우리 역시 엘리바스와 같은 입장을 보이지는 않았느니 반성해봐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애매한 고난,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좀 더 하나님 앞에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욥이 인내하고 겸손했던 초기 반응과는 사뭇 다릅니다. 물론 우리는 그 때에도 욥의 의연함,

한결같이 순전한 믿음 등에 적지 않게 감동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 때보다 지금 욥의 모습에 훨씬 더 인간미를 느끼지 않습니까?

 

 

 

 "아, 욥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수 있구나? 하나님과 이웃들을 향하여 자신의 억울한 신세를 마음껏 토로할 수 있구나?" 하면서

 더 큰 친근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더욱 솔직해져야 합니다.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여도

 우리의 속마음에 솔직한 것만이 더욱 더 깊고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첩경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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