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

욥기 강해설교(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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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1 16:16 조회5,2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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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닷의 첫 번째 공박: “네가 과연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없냐?”

<욥 8: 1-22>

 


 

 

오늘 본문 말씀은 욥의 두 번째 친구인 빌닷이 욥을 향하여 퍼부은 공박입니다.

빌닷도 엘리바스와 마찬가지로 세 차례씩이나 욥과 논쟁을 합니다.

 

 

그런데 빌닷 역시 엘리바스와 별 차이가 없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욥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은 필경 욥이 저지른 죄악의 결과라는 생각입니다.

 

 

이른바 인과율과 추수 법칙론이 다시 한번 욥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빌닷 역시 엘리바스 못지않게 지혜로운 사람이며 높은 경륜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욥에게 선생이나 된 냥 과거의 전통으로부터 이어받은 지혜와 지식과 경험,

관찰 등을 총동원하여 욥이 저지른 잘못과 죄악을 깨우치게 하여 빨리 하나님께 회개한 뒤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가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욥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수많은 재산과 10 자녀들을 잃고 마침내 자신의 건강까지 잃고 빈사(瀕死) 상태에 빠진 욥을

 이렇게 코너로 몰고가는 모습은 친구가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엘리바스나 빌닷은 친구가 지금 얼마나 극한 슬픔과 아픔에 빠져 있는가 하는 상황적 이해가 너무 부족합니다.

 

 

게다가 여러 세대를 거쳐 전수받은 빌닷의 지혜가 적어도 겉보기에는 하나도 나무랄 데가 없지만 문제는

그 일반 원리를 교조화하여 기계론적으로 적용시키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빌닷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1. 욥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에게까지도 적용된 인과율(8: 1-7)

 

 

 

 2절 말씀을 보면 엘리바스와 달리 빌닷의 발언은 굉장히 공격적이고 비판적으로 시작됩니다.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욥이 엘리바스에게 대꾸할 때 자신의 결백을 강조하자 욥을 힘껏 다그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빌닷은 욥이 분명히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을 당한다는 부동의 전제를 가지고 욥을 몰아붙입니다.

 

 

자, 그러면서 3절을 보면 "너는, 하나님이 심판을 잘못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전능하신 분께서 공의를 거짓으로 판단하신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으로 욥의 결백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의로운 사람을 상주시고 죄있는 사람을 벌주시는데,

네가 이와 같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네 죄 때문이라는 주장이지요.

 

 

 

 

 더욱 기가 막힌 것인 이와 같은 인과응보의 법칙,

추수의 법칙을 이미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은 욥의 10자녀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시키는 비정함입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네 자식들이 주께 죄를 지으면, 주께서 그들을 벌하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냐?”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욥의 자식들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 아닙니까? 죄지은 결과로서 욥의 자녀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해석이지요.

얼마나 가혹한 해석인지 모릅니다.

 

 

 

이런 논리가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할지라도 욥의 상처 난 가슴을 헤집고 후비는 폭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빌닷은 5-7절에서 우리 목회자들이 심방 가서 자주 인용하는 유명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식들은 죄악의 결과로 이미 죽었으니 아직 회복의 가능성이 있는

욥은 이 말씀을 듣고 빨리 하나님께 회개해서 구원받으라는 충고입니다.

 다같이 읽어볼까요?

 

 

 

 “그러나 네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전능하신 분께 자비를 구하면, 또 네가 정말 깨끗하고 정직하기만 하면,

주께서는 너를 살리시려고 떨치고 일어나셔서, 네 경건한 가정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겠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다.”

 

 

 

저는 이 말씀을 잘못 설교했다가 낭패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어느 교우님 가정이 개업을 해서 그저 보통 목회자들이 하듯이 깊은 생각 없이 이 본문을 선택해서 설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전화를 해서 과연 이 말씀이 개업 예배에 적절한 본문인지 따지는 것입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당황하면서 "야, 우리 교회에도 꽤 수준 높은 교인이 다 있구나!" 생각하면서 사과했습니다.

 


 

 

 

 

 사실 다른 성경 말씀이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욥기, 욥기 중에서도 특히 욥과 세 친구들 사이의 대화 내용은

 

 

어느 한 부분만을 싹둑 잘라서 쉽게 설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전후문맥을 잘 따져봐야 합니다. 사실 이 말씀 하나만 놓고 생각하면 구구절절이 옳은 말씀이요,

새로 시작하는 성도의 사업이나 가정을 축복하기에 안성맞춤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빌닷이 이런 말씀을 욥에게 던지는 배경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결코 욥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던진 말씀이 아니라 정죄하고 심판하기 위한 말씀이라는 문맥이 문제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 말씀은 빌닷이 살고 있던 당대에 매우 잘 알려진 지혜의 격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빌닷이 이 말씀을 욥에게 던진 배경이 중요합니다.

 

 

 

 빌닷이 말하는 "미약한 시작"은 죄를 지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나타난 "고난받는 현재의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욥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면,

또 욥이 정말 깨끗하고 정직하게 살기만 하면 비록 현재는 미약해서 고난을 받지만

그 나중은 심히도 창대한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옳은 말이고 욥기의 결론부를 보면 욥이 실제로 그런 축복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욥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지요.

 

 

 빌닷이 미약한 욥의 현실을 욥이 하나님께 지은 죄악의 결과로서 해석하는

 한 이 말씀은 욥에게 고통만 가중시킬 뿐 그 어떤 위로도 되지 못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전후문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성경의 어느 한 구절만 적당히 발췌해서

상황에 함부로 적용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왕골과 진펄, 갈대와 물(8: 8-19)

 

 

 자, 이제 8-10절 말씀을 보면 빌닷은 욥이 과거에 지은 죄의 결과로서 현재의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선조들의 경험을 끌어들입니다.

 

 

선조들의 지혜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항상 유익한 것만은 아닙니다.

 이른바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정통 신학이라는 것이 도그마가 되어서 기계적으로 아무 구별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될 때 사

람을 얽어매는 또 하나의 사슬이 될 수가 있습니다.

 

 

 11-19절 말씀을 보면, 빌닷은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지혜 가운데 몇 가지 비유를 제시합니다.

먼저 왕골과 진펄을 비유로 듭니다. 왕골, 즉 골풀은 식물의 일종인데 반드시 진펄, 즉 늪지대에서 자랍니다.

그 다음에 갈대도 마찬가지로 물 있는 곳에서만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물이 빠진 상태에서 왕골이나 갈대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비유의 핵심은 13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잊는 모든 사람의 앞길이 이와 같을 것이며, 믿음을 저버린 사람의 소망도 이와 같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갑작스레 물이 빠져 때가 되기도 전에 말라비틀어지는 왕골이나 갈대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14-1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금방 끊어지고 말 거미줄을 의지하는 사람같고

쉽게 부서질 집을 보호막으로 삼는 사람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결국 빌닷의 비유는 또 하나의 인과율에 대한 비유입니다.

 욥이 명백히 불의한 자이기에 물이 다 빠져 말라가는 왕골이나 갈대와 마찬가지로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빌닷의 비유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참혹한 고난을 겪고 있는 욥에게는 결코 시의적절한 말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욥에게 필요한 것은 신학적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인과응보의 논리로 욥의 죄성을 파헤치는 것이 아닙니다. 정직한 침묵, 아니면 따뜻한 위로 한 마디입니다.

 



 

 

3. 새로운 미래에 대한 약속(8: 20-22)

 

 

 이제 빌닷의 첫 번째 발언의 결과는 20-22절 말씀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온전한 사람 물리치지 않으시며, 악한 사람 손 잡아 주지 않으신다. 그분께서 네 입을 웃음으로 채워 주시면,

네 입술은 즐거운 소리를 낼 것이니, 너를 미워하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며, 악인의 장막은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기에 욥이 미래에 웃고자 한다면

자신의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올바른 삶을 회복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욥은 악인의 장막과 마찬가지로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희망찬 미래에 대한 설계도 이와 같이 욥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한 상태에서 욥이 지은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만 된다는 조건부적인 것입니다. 이런 일반 논리가 모든 사람에게 차이 없이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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