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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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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0:05 조회4,9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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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3): '은혜 위에 은혜'  

<요 1: 14-18>


 요한복음의 서론 격에 해당되는 요 1: 1-18은 오늘 봉독한 1: 14에서 그 절정에 이릅니다.  흔히 '말씀 기독론'(logos christology), 즉 '성육신 기독론'(incarnation christology)의 핵심은 1: 14에서, 그리고 구원론의 진수는 3: 16에서 나타났다고 봅니다.  사실 1: 14에는 예수님과 관계된 모든 중요한 용어들--즉, 말씀, 육신, 영광, 독생자, 은혜, 진리--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는 은혜 위에 은혜가 충만하며, 예수님을 본 자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본 것과 다름없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으며,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서나 발견할 수 있는 은혜와 진리가 그 위에 늘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의 옷을 입고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14절을 보세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나 희랍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말씀이었습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어김없는 원리로서 온 세상의 질서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이 하늘에 그냥 머무르신 것이 아니라 육신을 입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 하나님 자신이 성육신(成肉身) 인간이 되셨는데 바로 이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창조하고 만물에 생명을 주고 지혜를 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물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알기 원하는 사람들마다 인간 예수님을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희랍인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는다는 것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을 즐겼던 희랍사람들은 영혼과 육체를 날카롭게 구분하면서 육체를 악한 것으로서, 영혼을 가두는 감옥 혹은 무덤으로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상한 사람일수록,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일수록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대신에 육체를 경멸하고 학대해야만 했습니다.  육체는 온갖 정욕과 죄악의 뿌리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고를 가졌던 희랍인들에게 하나님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과 희랍인들 모두에게 불가사의한 일이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 예수라는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늘에 계시던 하나님께서 땅에 오셨습니다.  영원 속에 거하시던 하나님께서 시간과 역사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추상적이던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인 사건이 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 위에는 세 가지가 충만했습니다. 

 

 1. 예수님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인간으로부터 오는 영광이 아닙니다.  공부 잘해서 상 받고, 노래 잘해서 트로피 받고, 대통령에 당선되고 국회의원에서 당선되어서 얻는 세상적인 영광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독생자만이 누릴 수 있는 하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 5: 41에서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요 7: 18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마다 주님이 가졌던 똑같은 영광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요 17: 22에서 말씀합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이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이 누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단순한 은혜가 아니라 16절 말씀처럼 '은혜 위에 은혜'(grace upon grace)가 예수님 위에 있습니다.  강조법을 쓴 것입니다.  풍성하고도 충만한 은혜가 주 예수님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예수님은 더욱더 신비롭고 위대한 분이 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면 살수록 예수님은 점점 더 우리에게 사랑스럽고 존귀한 분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평은 점점 더 넓어지고 커집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끝없이 솟아나는 샘물이시요, 파도 파도 끝이 없이 보물들이 쏟아지는 광맥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선물입니다.  선물과 뇌물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선물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거저 무상으로 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받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기쁨으로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뇌물은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건네는 것입니다.  뭔가 의도를 가지고 선심을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선물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도무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아무 자격도 가치도 없는 존재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끝이 없는 사랑으로 공짜로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바울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울부짖었던 것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는 한 시도 살 수 없습니다.  연약하고 부족하기만한 죄인들인 우리, 도무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통하여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그 은혜 때문에 오늘을 삽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읍시다!  말씀을 통하여, 생활을 통하여, 무엇을 하든지 순간 순간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받읍시다!  은혜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은혜 위에 은혜'가 항상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 위에 하나님의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 중에 하나가 '진리'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한결같습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사실은 진리입니다.  지구가 만들어진 이래 한번도 변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거짓의 반대입니다.  참이 아니고 사실이 아니고 진짜가 아닌 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진리는 모든 무지를 제하여 버리고 밝은 지혜로 안내합니다.  어리석음과 무지 속에는 진리가 깃들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이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4: 6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태초부터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삼라만상의 질서를 주장해오신 하나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그러므로 태초 이래로부터 한번도 변함이 없으신 분이 우리 주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 거짓이 있고, 시간에 따라 역사에 따라 변덕이 있다면,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실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만이 가지실 수 있는 진리를 온 몸으로 체현(體現)하신 진리 그 자체이십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마다 이제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 진리와 거짓을 가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무엇이 하늘의 것이며 무엇이 땅의 것인지 분명히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진리이신 예수님을 아는 자마다 모든 무지와 거짓, 억압의 사슬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요 8: 32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이라는 진리의 거울에 자기의 얼굴을 비추는 자마다 자기의 진짜 모습을 확연히 알게 됩니다.  온갖 위선과 가식과 죄로 범벅이 된 자기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 참 자유와 구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리 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 자신의 욕심과 죄악이라는 감옥과, 이 세상이라는 헛되고 무상한 사슬로부터 해방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영원토록 한결같으신 진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진리, 예수님을 붙드십시오!  그래야 무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최고요, 자기가 의인이요, 자기가 제법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무지와 착각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진리의 우물에 여러분의 모습을 한번 비추어 보십시오!  예수님이라는 진리의 거울로 여러분의 얼굴과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거기에 형편없이 추한 여러분의 모습이 신기하게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왜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지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의 결론은 아주 간단합니다. 
 

 결어: 예수님을 보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을 봅니다.
 18절을 보세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독생자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누군가의 품안에 있다는 사실은 최고의 친밀감과 사랑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든, 아니면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이든 간에 누구를 품에 안는다는 것은 극진한 사랑을 의미합니다(민 11: 12; 신 13: 6 참조).  그런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그 가슴에 안고 계십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최고의 친밀감과 최고의 사랑으로 품에 껴안으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직접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합니다.  출 33: 20은 말씀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또한 신 4: 12에서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이 없습니다.  설상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았다고 해도 어두운 밤에 내리꽂는 번개가 일순간 반짝거리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지극히 미세한 부분을 체험했을 뿐인 것입니다.  빙산의 일각을 맛보았을 뿐입니다.  구약 시대의 최고 인물이 누굽니까?  모세입니다.  모세로부터 하나님의 율법이 왔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영웅이자, 율법 수여자로서 위대한 모세도 하나님의 음성만 들었을 뿐 하나님님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여저히 우리와 같은 한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기자는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예수님을 본 사람들마다 이제 완전한 하나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숨겨졌던 하나님의 적나라한 모습 전체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지만 오직 예수님은 하나님을 직접 보았습니다(요 6: 46).  예수님은 그 근본이 하나님과 본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면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알려면 예수님의 용서를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알려면 예수님의 지혜를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면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진리가 그 위에 항상 충만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붙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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