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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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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0:06 조회5,7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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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4): '겸손의 표상 세례 요한'  

<요 1: 19-28>


 예수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 11)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찬사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세례 요한보다 더 위대한 이는 없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세례 요한을 이처럼 높이 보셨을까요? 

 그것은 요한이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높이려면 얼마든지 높일 수 있었고, 또 메시아 자리까지 넘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예수께서 활동을 잘 하실 수 있도록 길 닦는 일이 자기가 해야할 일이라고 겸손해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인격 속에서 겸손의 표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뒤에 오는 이가 잘되기 위해서 나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만 한다는 희생 정신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는 결코 태양이 아니며 다만 태양을 볼 수 있는 망원경 역할을 하면 족하다는 자족의 정신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는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는 겸비함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대표로 뽑아서 세례 요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요 1: 24에 보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레위인들은 요한 복음에서 언제나 예수님의 적대자들로 나타납니다.  요한 복음은 크게 두 가지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계시되었다는 사실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계속해서 배척하며 능멸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집요한 반대와 증오를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요한 복음의 또 다른 한 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의 대표로서 어떻게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뽑혔을까요?  먼저 눅 1: 5을 보면 세례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와 아론의 자손인 엘리사벳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은 오직 레위 지파 아론의 혈통을 따라 세습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혈연적으로 볼 때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인 요한이 왜 그 당시 보통 제사장들과는 전혀 다르게 물로 세례를 주는가, 이것이 궁금해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대표로 뽑아서 질문을 던지게 한 것입니다.  아마 이들의 배후에는 산헤드린이라는 유대 공의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산헤드린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정통이 아닌 사이비 제사장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색출해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찾아가 심문을 한 이유는 세례 요한의 정통성과 이단성 여부를 가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를 잡으려고 하는 의도였습니다. 

 

 이들이 세례 요한에게 던진 질문들은 크게 네 가지였습니다. 

 1.  "네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19절).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자기를 바로 안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자기의 신분이 무엇인지, 자기가 무엇하기 위해 이 세상에 있는지, 자기가 어느 정도의 사람인지, 이것을 바로 아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 당시 세례 요한에 대하여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 크기의 인격을 가진 사람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세례 요한은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고 했습니다(20절).  영어 성경 NRSV를 보면, "He confessed and did not deny it."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부인하지 않고 솔직하게 고백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요?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I am not the Messiah."  언뜻 생각하면 아주 쉬운 대답 같지만 세례 요한의 처지로 볼 때 결코 쉬운 대답만은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면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참신한 예언의 말씀에 굶주려 있던 백성들에게 세례 요한은 단번에 인기 있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구약 성경 여러 곳에 약속된 메시아가 바로 자기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바로 이와 같은 잠재적 욕망에 대해서 단호하게 "NO!"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세례 요한의 진정한 인격이 돋보이는 것입니다. 

 

 2.  "네가 엘리야냐?  아니면 그 선지자냐?"고 물었습니다(21절).  먼저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아마 구약 시대의 예언자 중에 가장 능력을 많이 행한 사람이 엘리야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즉 세상의 심판이 있기 전에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면, 말 4: 5은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임하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돌아와 모든 분쟁거리를 깨끗이 정리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면, 누가 정하고 누가 부정한지, 누가 유대인이며 누가 유대인이 아닌지 가려내고, 서로 떨어져 있던 모든 가족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엘리야가 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금전이나 재산과 관련해서 소유권 논쟁이 있을 때마다 장차 엘리야가 도래해서 이 모든 문제들을 극명하게 처리해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한창 인기가 하늘을 치솟듯 할 때 자기가 바로 엘리야라고 슬쩍 말하고 싶은 충동이 있을 법합니다.  요한의 처지로 볼 때 자기가 엘리야라고 해도 세상 사람들이 충분히 믿을만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 역시 과감히 물리쳤습니다.  요한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의 명언을 세례 요한은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네가 바로 그 선지자냐?"고 물은 것은 유대인들이 언젠가 이사야나 에레미야가 메시아가 도래하기 전에 최고의 선지자로서 다시 오리라 믿었습니다.  이것은 특히 신 18: 15에 있는 말씀을 근거로 한 믿음이요 기대였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대표가 "네가 바로 그 선지자냐?"고 물은 것은 "네가 바로 선지자 중에 선지자, 최고의 선지자냐?"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선지자 중에 선지자, 목사 중에 목사, 이런 칭호를 듣는다는 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요?  사역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이런 소리를 듣고 싶을 것입니다.  오늘날 성공했다는 목회자는 너나할 것 없이 이런 소리를 듣고 싶어 안달입니다.  마치 자기가 맨주먹으로 신화를 이루어냈다는 사실을 역사에 남기려고 야단법석을 떱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질문에 대해서도 여전히 "NO!"라고 외쳤습니다.  자기는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는 메시아도 아니며, 엘리야도 아니며, 그렇다고 마지막 때의 참 선지자 진짜 선지자, 목사 중의 목사도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대표는 점점 더 강도를 약하게 하면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메시아보다는 엘리야가 작고, 엘리야보다는 그 약속했던 선지자가 작은 범주입니다.  비록 메시아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엘리야나 아니면 진짜 선지자 정도라고는 말할 수 있을 법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 세 가지 모두에 대해서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요한의 깊은 속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겸손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22절).  초조해진 대표자들이 계속해서 다그쳐 묻습니다.  자기들을 보낸 유대인들, 즉 바리새인들에게 대답할 수 있도록 네가 누군지 이제는 네 입으로 분명히 말해달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이 우리가 너에게 물은 질문이나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너에 대하여 생각하는 바를 질문으로 던진 것이라면, 그러면 너 자신은 너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말해달라는 것입니다.  요한 스스로가 생각하는 요한의 진면목에 대해서 말해달라는 주문입니다. 

 이들은 처음 두 질문에서 모두 실패했습니다.  뭔가 꼬투리를 잡기 위하여 질문을 던졌지만 세례 요한은 그 덫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겸손한 인격이 올무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 주었습니다.  마침내 "세상 사람들이 너를 메시아나 엘리야나 아니면, 선지자 중의 선지자로 여긴다고 해도 네 스스로가 아니라 한다면, 이제 너는 네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며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요한은 사 40: 3을 인용함으로서 대답을 대신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메시아가 올 때 사람들이 준비하고 맞을 수 있도록 그 길을 곧게 하고 외치는 사명이 자기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는 메시아가 오셔서 편히 일할 수 있도록 터를 닦고 사람들을 일깨워 준비시키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메시아에 대하여 외치는 하나의 목소리와 증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에 비하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세례 요한의 진정한 겸손이 있습니다.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마음껏 일하실 수 있도록 길을 닦고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주는 일, 즉 준비하는 일이 자기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잊어버려도 좋은 조연에 불과하지만 메시아는 잊어서는 안될 진짜 주인공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마다 미리 오셔서 마이크도 준비해주시고, 물도 떠놓으시고, 촛불도 점화해 놓으시는 분들에게 늘 감사합니다.  그런 분들의 준비와 수고가 있기에 제가 은혜로운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이 열심히 메시아 되신 예수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분위기를 띄우고 여건을 만들어 준다는 사실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사역자끼리 누구는 스폿트 라이트를 집중적으로 받는 주연이 되고 누구는 후미진 곳에서 이름 없는 조연이 되고 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이 쉽지 않은 일을 겸손한 마음 하나로 능히 해냈던 것입니다.       

 

4.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25절).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레위인들은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집니다.  사실 요한이 메시아나, 아니면 엘리야나, 아니면 그 선지자일 경우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 특권이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겔 36: 25은 말씀합니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한 슥 13: 1은 말씀합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이와 같이 선지자들은 혹 죄를 씻는 세례를 베풀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줄 수 있는 세례는 모두 다른 종교를 믿다가 유대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된 세례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방인들에게 준 정결 예식의 하나가 세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대상으로 한 세례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물로 다시 씻을 필요가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 일반을 대상으로 정결케 하는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오직 이방인들에게나 주어야 할 세례 예식을 자기 동족들에게 베풀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요한이 메시아와도, 엘리야와도, 또 선지자와도 아무 상관없다면 도대체 무슨 권세로 이와 같이 유대인 전체를 대상으로 한 세례를 베풀 수 있느냐는 문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요한은 직접적인 대답을 피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26-27절).  학자들은 자기가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강조할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들메를 묶고 푸는 일은 전적으로 노예가 주인에게나 하는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랍비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 있습니다.  "제자가 노예가 자기 주인을 위하여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스승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지만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  그것은 자기 스승의 신들메를 묶거나 푸는 일이었다."  제자가 하늘같은 스승에게도 하지 않던 일이 바로 신들메를 푸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비천한 종이 하는 신들메 푸는 일조차도 자기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고백합니다.  극한 겸손의 표현인 것입니다. 

 

결어: 세례 요한은 겸손의 표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잘될 수 있다면 자기는 무엇이든지 다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흥할 수만 있다면 자기는 능히 망하는 길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이로 치나 경력으로 치나 예수님보다 연장자요 선배였습니다.  교만한 마음을 품었다면 예수님을 얼마든지 깎아 내리고 자기를 높일 수 있었지만 요한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인격이 진실로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겸손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약 4: 10절은 말씀합니다.  "주 앞에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위치를 잘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것과 사람의 것을 가릴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사이를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기 때문에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습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자기 이상도 자기 이하도 아닌, 꼭 자기 자신이 되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자기보다 높아지려는 것은 교만입니다.  자기보다 낮아지려는 것은 비굴입니다.  "네가 누구냐?  네 자신은 너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하는 질문 앞에 자기를 바로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자기의 분수를 바로 알아서 교만에도 빠지지도 않고 비굴함에도 빠지지 않는 것, 거기에 진짜 겸손의 길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세례 요한은 자기를 너무나 잘 안 사람입니다.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요, 달을 가리키는 작은 손가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은 겸손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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