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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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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0:15 조회7,5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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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6): '물세례와 성령세례'  

<요 1: 32―34>


 본문 말씀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두 번째 증거한 말씀의 후반부입니다.  요한복음 전체에 깔려 있는 중심 사상 중에 하나는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비교할 때 아주 작은 사람이라는 믿음입니다.  메시아 혹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의 신분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안내하는 한 사람의 증인으로서의 요한의 차이는 양자가 베푼 세례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과 비슷한 구절은 공관복음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막 1: 9-11을 보라).  특히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날카롭게 구분해 놓은 것은 공관복음서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주제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서와 다른 점은 전자가 "비둘기 같은 성령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물렀다"(32절)고 보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공관복음서에서는 단지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내려왔다고 말하는데 반하여, 요한은 비둘기 같은 성령이 예수님 위에 머물러 있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차이점을 살펴보기 전에 비둘기 같은 성령이 예수님 위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비둘기는 성별된 새였습니다.  비둘기는 거룩한 새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함부로 사냥을 하거나 먹지도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집에서 길들여 키웠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대 유대인들은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비둘기가 지붕이나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모습을 지켜본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신이 내려오는 모습을 연상했습니다.  창 1: 2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이 물위를 휩쓸고 다니는 모습이 꼭 비둘기가 날아다니는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 랍비들은 성령이 비둘기처럼 날아다니며 혼돈 속에 질서와 아름다움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 역시 그 당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비둘기와 같이 거룩하고 순결하고 평화로운 성령이 예수님 위로 날아와 머물렀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그러면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어떻게 다릅니까?  사실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장 명확하게 구분시켜주는 것이 바로 양자가 베푼 세례가 달랐다는 점입니다.  33절을 한번 보세요.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주신 사명은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어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게 하는 일이었습니다(31절 참조).  그런데 하나님께서 비둘기 같은 성령으로 충만한 이, 즉 예수님을 통해서는 성령세례를 베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베푼 물세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희랍어 'baptizein'은 영어로 'dip,' 즉 '담그다,' 혹은 'submerge,' '물 속에 빠뜨리다'는 뜻을 가집니다.  쉽게 말해서 옷에 물감을 먹이기 위해서 염료에 옷을 담그는 것이나 배가 물 아래 빠져 잠기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술에 취한 사람이 술에 푹 빠져 있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오순절날 성령세례로 충만했던 사람들을 새 술에 취했다고 말합니다.  행 2: 13 참조.)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로, 심령을 깨끗케 함을 의미합니다.  물이 정결함을 상징하듯 물에 우리의 온몸을 담근다는 사실은 우리 마음에 붙어 있는 온갖 더러운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정화시킨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별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을 때 이는 우리가 보통 사람과 성별(set-apartness) 되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노아의 가족 8명이 물, 즉 홍수를 통하여 구원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와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은 죄와 죽음의 강을 건너 구원과 영생의 세계로 인도함을 받았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한 가지 중요한 물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오늘날 침례교단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전신침례를 받아야 마땅할까요?  아니면 우리 감리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약식세례만으로 충분할까요?  여러분, 세례는 우리가 성별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상징적인 예식입니다.  다시 말해 세례 그 자체나, 세례 받는 물이나, 세례받는 방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례에 담긴 의미가 본질적인 것이지 그 밖의 요소들은 모두 지엽적이며 액세서리에 불과합니다.  만일 세례받는 물이 정말로 중요하다면 우리는 전부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셨던 요단강에 직접 가서 전신침례를 통하여 세례 예식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세례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구원을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고대 중동 지방에서는 물이 아주 귀했습니다.  중동 사막지방에 언제나 간신히 마실 정도의 물만이 주어졌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초대 교회 사람들은 조개껍질에 물을 담아서 세례를 베풀었는데 세 방울의 물, 즉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이름을 지시할 수 있는 정도의 물방울만 있으면 언제든지 세례를 베풀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세례받는 방법, 즉 전신침례냐 약식세례냐가 우리의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성령세례가 뜻하는 바를 올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요단강에 직접 가서 아무리 수 백번 전신침례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성령세례를 받아 거듭나지 않으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령세례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 '성령'은 'ruach,' 즉 바람(wind)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에 대하여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요 3: 8).  이것은 성령이 꼭 바람과 같이 자유롭게, 그러나 보이지 않게 역사하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령이 능력과 생명을 가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바람처럼 불어닥치는 곳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대로 나타나고 말라 비틀어졌던 것들이 생명력으로 충만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미 3: 8에서 말씀합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또 겔 36: 26-27에서 말씀합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은 바람처럼 임의로 불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알려주고 생명을 주며 진리를 지켜 행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의 전 삶이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옷에 물감이 가득 베이는 것처럼, 배가 물에 깊이 잠기는 것처럼, 술취한 사람이 술기운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으로 흠뻑 젖어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첫째로, 우리의 마음이 밝아져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밝히 알게 됩니다. 

 둘째로, 우리 삶에 힘을 얻게 됩니다.  능력 없이 지식만 가득차 있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게 될 때 우리의 지식은 메마르고 차가운 이론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삶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매일 사탄의 세력을 정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의 삶이 정화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성령은 물세례와 대비해서 흔히 불세례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마 3: 11(또한 눅 3: 16 참조)에서 말씀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물이 우리의 몸을 깨끗이 씻어주듯이 불은 우리의 모든 죄악과 더러운 것들을 불태워 소멸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도록 정련시켜 줍니다.  우리 마음의 모든 불순물들이 성령의 불에 녹아져 사라지게 됩니다. 

 

결어: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점은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차이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물세례도 중요하고 성령세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령세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요한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에 상응합니다.  물세례는 우리가 성별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알리는 외적인 표시(external sign)입니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우리 마음이 진실로 할례받고 중생하였음을 알리는 내적인 표시(internal sign)입니다.  내적인 변화 없는 외적인 의식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세례 없는 물세례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동시에 받으시는 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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