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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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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0:43 조회4,6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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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강해 (16): '이것이냐? 저것이냐?'  

 <요 3: 16―21>


 <배경 분석>
 요한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두 가지 상반되는 대립 개념을 주목해야 합니다.  빛과 어두움, 생명과 죽음, 구원과 심판, 신앙과 불신앙, 등등의 대립 개념이 자주 등장합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소개한 후 요한 복음 기자는 요한 복음 전체는 물론이고 성경 전체를 요약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요 3: 16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주셨는데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려는 뜻과 계획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와 같이 영생과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서 심판을 받고 멸망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자들이요, 진리보다 거짓을 더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다음부터 두 가지 길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를 믿고 영생과 구원을 받는 길이 하나이고, 예수를 배척하고 믿지 않아서 심판과 멸망 받는 길이 또 다른 하나의 길인 것입니다.  양자택일의 길이 우리 앞에 주어져 있는데 결단과 이 결단에 따르는 책임은 자유의지를 가진 개인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요 3: 16,' 복음 중의 복음> 
 우리가 좋아하는 성구는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요 3: 16은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성구입니다.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 이 말씀 한 구절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 구절을 '작은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을 복음 중의 복음이요, 복음의 진수 혹은 엑기스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 하나에 성경 전체의 비밀이 숨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 하나만 잘 이해하면 구원의 도를 확실히 깨우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① 구원의 주체, 즉 기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기 쉬운 것은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진노하시고, 엄격하시고, 용서치 않으신 데 반하여 예수님은 자비롭고, 부드러우시며, 끝없는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이원적 개념입니다.  요 3: 16이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순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주도권 때문에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뜨겁게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 위에 못박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복음에 있어서 한 가지 타협할 수 없는 대전제는 구원이 우리 인간의 선행이나 노력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요 3: 16은 바로 이러한 대원칙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② 구원의 방법은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데 있습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간이 멸망 받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양심적으로 살고, 윤리 도덕적으로 살고, 선행과 자비를 많이 베풀며 산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그 모든 인간의 노력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필요 충분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외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이들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다른 종교와 갈라지는 분기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있습니다.  요 3: 16은 구원의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③ 구원의 범위는 이 세상 전체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기독교인들이 흔히 착각하기 쉬운 것은 하나님께서 오직 기독교인들만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요 3: 16은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만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믿는 이들은 물론이고 믿지 않는 이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도저히 받을 자격이 없는 무수한 죄인들까지 포함하는 세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하여 사랑의 손길을 펼쳐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도 이 세상 전체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길: 영생과 멸망>
 요한 복음 기자가 거듭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류를 구원하시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 또 한 차례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하나님의 가슴은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불타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의 반응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의 이름을 믿지 않고 심판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① 사람이 심판 받고 멸망 받을 때 그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의지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시인할 수도 있고,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사람이 예수 이름을 믿지 않아서 심판과 멸망을 받을 때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사실입니다.  장로교에서 가르치는 이중 예정론이 가질 수 있는 함정은 구원과 멸망의 책임을 다 하나님께 돌릴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인류 중에 어떤 이들은 구원받도록 미리 선택 해놓으셨고 또 어떤 이들은 멸망 받도록 미리 선택해 놓으셨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색하게 됩니다. 

 요 3: 18에 구원받지 못하는 이들의 이유를 분명히 밝혀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받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자유의지를 그릇되게 사용함으로서 멸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없이 구원받을 기회가 주어졌지만 예수 이름을 믿지 않음으로 심판과 멸망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습니다.  

 

② 심판과 멸망 받는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 기자는 더 구체적으로 심판 받고 멸망 받은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19절에 보면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을 미워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대부분의 죄악들은 어두움 속에서 일어납니다.  광명정대한 빛 안에서는 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께서 오셨으되 사람들은 여전히 어두움 속에서 죄짓고 악한 일을 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빛 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보다 어두움 속에서 지내는 일을 더 편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the myth of cave, in The Republic)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일생동안 동굴 감옥 안에 갇혀서 빛이라곤 전혀 없이 오직 그림자만 보고 지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죄수가 사슬에서 풀려나 밝은 빛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 사람이 빛의 세계를 다 보고 나서 다시 동굴로 돌아가 자기 동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말해주어도 사람들은 믿지 않고 오히려 이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빛 되신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두움 속에서 지내온 것이 너무나 익숙하고 편해서 감히 예수님을 영접할 엄두를 못 내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미 빛이 비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움 속에 빠져서 그 세계를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과 멸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③ 그러므로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부터 온 자이며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완악하고 어두움 속에 있다고 해도 그 중에는 빛을 사모하고 진리를 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 21절은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이 모두 하나님 안에 행하는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해서 빛과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구원받은 백성들인 것입니다.

 

<결어>
 우리 앞에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영생의 길과 심판의 길입니다.  구원의 길과 멸망의 길입니다.  빛의 길과 어두움의 길입니다.  진리의 길과 거짓의 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길을 선택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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