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

요한복음 강해(26)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0:57 조회4,531회 댓글0건

본문

요한 복음 강해 (26): '낙오자가 재기하는 법'  

  <요 5: 1―9>


 <본문 배경 및 분석>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행한 치유 이적입니다.  유대인들이 꼭 지켜야만 하는 국가적 명절이 셋 있습니다.  먼저 유월절은 우리나라의 광복절, 미국의 독립 기념일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광복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인 것이지요.  둘째로 오순절은 유월절이 끝난 후 50일째 되는 날에 벌이는 축제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을 기리는 절기입니다.  셋째로 수장절 혹은 초막절이 있는데 농작물의 소출을 기념하며 광야 생활의 고난을 되새기는 절기로서 7일 동안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명절에 예루살렘에 오르셨다고 했는데 이 세 절기 중에 어떤 절기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요 6장이 5장보다 앞선다는 견해를 가진 학자들은 유월절이 아닌 것은 분명하고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오르신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합니다.  어떤 절기에 예루살렘에 계셨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문에 나오는 치유 사역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공관 복음서 그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병자를 고치셨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단 한 가지 예외를 들라면 마 21: 14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눈 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을 고쳐주셨다는 말씀이 나오지만 구체적인 상황 설명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치유 이적, 이것이야말로 가장 요한 복음다운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양문(羊門), 즉 양의 문이라는 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 옆에는 히브리어로 '베데스다'(Bethesda)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의 뜻은 '자비의 집'(the house of mercy)입니다.  또 어떤 학자는 다른 성서 사본에 근거해서 '베드자다'(Bethzatha)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고 주장합니다.  '베드자다'라는 말은 '감람나무의 집'(the house of olives)입니다.  '베데스다'인지 아니면 '베드자다'인지 간에 이 연못은 다섯 개의 '행각'(porticoes), 즉 '주랑' 혹은 '현관'이 서 있었습니다. 

 이 행각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3절에 보면,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중풍병자들)"이 무엇인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4절에 보면 물의 동(動)함, 즉 움직이는 것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습니다.  그 이유는 전설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전설입니까?  가끔가다가 천사가 연못에 내려와서 못을 휘젓는데 이 순간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뛰어드는 사람의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었습니다. 

 성서 학자들은 베데스다 연못이 '온천'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지금도 알칸사 'Hot Spring'이라든지, 한국의 '수안보,' '온양,' '백암' 등의 온천지에 환자들이 자주 갑니다.  뜨거운 온천수에 미네랄 성분이 있어서 몸에 좋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특별히 강이나 온천수를 신성시했습니다.  물에는 항상 물을 주관하는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희랍의 시인 헤시오드(Hesiod)에 따르면, 고대 사람들은 강을 건너려면 반드시 기도한 뒤 손부터 씻어야만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만일 기도도 하지 않고 손도 씻지 않은 상태에서 강을 건널 경우 강신(江神)이 분노해서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방해하거나 목숨을 빼앗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고대 로마의 장군이었던 루쿨루스(Lucullus)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기 전에 황소를 제물로 바쳤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고대 사회에는 물을 신성시해서 물과 관련된 신비한 전설들이 많이 있었고 베데스다 연못 역시 예외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경쟁 사회에서 낙오된 38년 된 병자> 
 이제 이 사건의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는 5절부터 시작됩니다.  병자들 중에는 38년째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끼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떤 병으로 38년 간을 고생했는지 아무런 언급도 없습니다.  그러나 6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그가 누운 지 오래된 것을 아셨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중풍병자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 가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사람의 대답은 가히 절망적이었습니다.  7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여러분, 이 말씀은 두 가지 기막힌 사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베데스다 연못가는 살벌한 경쟁 사회였습니다.  피도 눈물도, 인정사정도 없는 선착순의 세계였습니다.  물이 조금이라고 움직일 때에는 다섯 개의 행각 안에 죽치고 앉아있거나 누워 있던 환자들이 너나할 것없이 먼저 연못에 뛰어들려고 난리법석을 떨었습니다.  왜요?  가장 먼저 뛰어드는 사람이 병고침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친척이든, 동네 사람이든, 누구든지 상관없이 안면몰수하고 자기부터 먼저 살고 봐야 했습니다.  그러니 38년된 병자를 누구 하나 신경 써줄 여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보다 더 약쌉 빠르고 더 영리하고 더 행동이 날랜 사람들이 언제나 선수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 하나 이 사람을 번쩍 들어서 연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번번이 허탕을 쳐야만 했습니다.

 둘째로, 이 사람은 철저한 낙오자였습니다.  '낙오자'가 뭡니까?  제가 국어 사전을 보니까 두 가지 뜻이 있었습니다.  "대오에서 뒤떨어진 사람" 혹은 "사회나 시대의 진보에 뒤떨어진 사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선착순 사회의 대오에서 뒤쳐진 사람입니다.  38년씩이나 병을 앓으면서 번번이 선착순에 밀리고 경쟁에 밀려서 완전히 낙오한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구제불능의 절망에 빠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낙오자가 재기하는 법>
 

그런데 이런 낙오자가 예수님을 만나서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낙오자가 재기할 수 있었을까요?

 

 ① 더 이상 낙오하지 않겠다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6절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물으셨습니까?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사람은 38년 동안 병을 앓아 온 사람입니다.  그 38년 동안 무수한 좌절을 맛보아야만 했습니다.  경쟁 사회에서 철저히 뒤쳐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이런 상태에 빠졌더라면 모든 것에 절망해서 자포자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나왔습니다.  아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여전히 낫고자 하는 희망 하나로 하루도 빠짐없이 현장에 나왔을 것입니다. 

 낙오자의 대열에서 빠져나오려면 더 이상 낙오하지 않겠다는 간절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열망이 있는 곳에 반드시 해결책도 있는 것입니다.  꿈을 포기한 채 절망의 나락에 빠지면 영영 낙오 상태해서 재기할 수 없습니다!

 

 ②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협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협력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8절에 보면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이 사람은 38년 동안이나 병을 앓으면서 재수 좋은 날을 기다렸는데 그것이 다 무위로 끝났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환멸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아무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변에 가득 에워싼 약쌉 빠른 사람들에게 당해도 너무 당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말이라면 진절머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갑자기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런 명령을 내리실 때 이 환자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요?  그가 예수님에 대한 일말의 믿음이나 기대도 가지지 않았더라면 코웃음을 치면서 외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9절을 보세요.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작은 침대]를 들고 걸어갔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에 협력했습니다.  자신이 누워서 기다렸던 자리를 걷어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낙오자의 반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비결은 매우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위대한 일에 믿음으로 동참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할 때 낙오자 생활을 청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을 도와드릴 때 낙오의 대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결어>
 여러분 중에 혹시 인생의 낙오자라고 스스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세파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세상에 환멸을 느끼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야박한 경쟁 사회에 밀려서 스스로 뒤쳐졌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본문에 나타난 38년 된 병자를 생각하십시오. 

 이 사람보다 더 참혹한 낙오자도 드물 것입니다.  그런 낙오자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낫고자 하는 열망, 즉 낙오의 대열에서 벗어나기를 얼마나 소원하는지를 테스트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믿음으로 동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자리를 들고일어남으로서 하나님을 도와드렸습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사람은 낙오자의 대열에서 벗어나 건강한 정상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낙오의 대열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신의 간절한 열망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협력하는데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