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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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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1:43 조회3,9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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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강해(49): '내가 아는 한 가지'  

         <요 9: 13-34>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실로암 못에 보내어 고쳐주셨습니다.  문제는 소경이 눈을 뜬 다음에 소경과 소경의 부모, 그리고 바리새인들 사이에 일대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유대인들은 항상 예수님에 대한 적대자들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적대적인 유대인들을 대표한 그룹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안식일을 어겼다는 죄목에 관한 논쟁>
 눈을 뜬 소경 거지를 동네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트집을 잡았습니다.  제일 먼저 치유 사건이 안식일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아주 철저히 지키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안식일에 고치셨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첫째로, 진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발랐다는 것은 안식일에 일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규정을 보면 안식일에 기름을 접시에 가득 채워서 등잔 옆에 두고 심지 끝을 등 안에 두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일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름이나 심지를 아끼기 위해서 등잔불을 끄는 것 역시 금했습니다. 

 안식일에 신발에 못이 박힌 샌들을 신고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 짐지는 것을 금했는데 신발 밑에 박힌 못이 짐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손톱을 깎거나 머리카락을 뽑거나 수염을 깎는 것도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모두 안식일에 노동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진흙에 침을 발라 소경의 눈에 바르신 것 역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긴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이 안식일을 어기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금방 죽어갈 때, 즉 아주 위급한 경우에만 안식일에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다만 환자의 상태가 악화되는 것만 막아야지 더 나아지게 하려고 계속 치료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것조차도 노동으로 보았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안식일에 치통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진통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식초를 이빨 전체에 빨고 있어서는 안되었습니다.  또한 골절이 되었을 때 뼈를 바로 맞추는 일 역시 금했습니다.  심지어 골절이 되어서 손이나 발이 퉁퉁 붓게 될 때 그 위에다가 차가운 물을 붓는 일 역시 할 수 없었습니다.  모두 노동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명백히 죽고 사는 문제가 걸린 것이 아닌 소경의 경우 눈을 고친 것은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삼각 논쟁: 소경과 소경의 부모, 바리새인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서, 16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아니며 죄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눈을 뜬 소경에게 심문을 계속합니다.
 
 17절을 보세요.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 대." 

 소경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병을 고쳐주셨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이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 자체를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 기적 자체를 믿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논쟁은 삼각 관계로 확대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소경의 부모를 끌어들였기 때문이지요.
 
 ① 소경 부모의 입장: 당국이 두려워서 참말을 못하다
 소경이 예수님이 선지자라고 말하자 바리새인들은 그 부모를 소환했습니다.  부모는 먼저 두 가지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이 소경이 자기의 친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태어난 것을 시인했던 것이지요.  이 두 가지야말로 너무나 자명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아들의 눈이 떠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떳떳하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본문 21절을 보세요.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소경의 부모는 자기 아들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또 누가 병을 고쳐 주었는지 모른다고 잡아뗐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은 이미 어른이 되어서 책임 있게 자기 주장을 펼 수 있는 나이이기 때문에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유가 2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유대 회당으로부터 쫓아냈기 때문에 두려움으로 그랬다는 것입니다.
 
 스 10: 8에 보면 누구든지 유대 당국의 결의한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재산을 몰수하고 유대 공동체로부터 축출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회당으로부터 쫓겨나서 공민권을 박탈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항상 주변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무서운 형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경의 부모는 바로 이와 같은 종교적 파문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참말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이 부모는 매우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할 경우 뒤따를 무서운 핍박과 불이익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자기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말함으로서 책임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소경 아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② 소경의 입장: 예수가 죄인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
 바리새인들은 이제 소경을 향하여 두 번째 심문을 합니다.  대답할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세로 하라면서 다그칩니다.  그것은 예수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심문에 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소경의 대답이 매우 중요합니다.

 25절을 보세요.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참으로 천하명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경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 죄인인지 의인인지 하나님의 아들인지 인간의 아들인지 이론적으로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알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는데 자신이 나면서부터 오늘까지 평생을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은 고침을 받아 세상을 환하게 볼 수 있다는 현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 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잘 몰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놀라운 일만큼은 증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한 가지 경험적 사실만 담대하게 증거하면 됩니다. 

 주님이 진실로 원하시는 것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③ 바리새인의 입장: 모세의 제자인 자기들의 눈으로 보면 예수는 죄인이다
 소경을 두 번째 심문했을 때 바리새인들은 깜짝 놀랄만한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26절에 계속해서 소경을 다그칩니다.  "예수가 너에게 무엇을 했느냐?"  "그가 어떻게 너의 눈을 뜨게 했느냐?" 하면서 윽박지릅니다.  더 이상 질문이 궁해졌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일평생 앞을 못 보다가 지금 나아서 보게 되었다는 사실, 이것은 바리새인들조차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소경은 매우 용감합니다.  아마도 앞 못보던 자기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27절에 이제는 거꾸로 바리새인들을 공격합니다.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얼마나 해학적인 반어법입니까?  "아니, 제가 이미 자세히 말씀드렸어도 듣지 않으시더니 또 말해달라니 혹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그러시는 것은 아닌지요?" 하면서 거듭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는 바리새인들을 비꼬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소경의 재치 넘치는 반격에 바리새인들이 화가 났습니다.  28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소경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너는 예수의 제자이지만 자기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떠벌립니다.  그러면서 29절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지만 예수님은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소경의 반문이 또 걸작입니다.  30-33절을 보세요.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더니 소경의 반격은 참으로 날카롭습니다.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이 모세의 제자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은 안다고 하면서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은 왜 믿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째로, 예수가 내 눈을 이렇게 활짝 고쳐주었는데 당신들이 그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른다고 잡아떼는 것은 이상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며 경건하고 의로운 자를 들으시는데 지금 이렇게 내가 병고침을 받은 것을 볼 때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기적을 보여주시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악인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욥 27: 9; 시 66: 18; 사 1: 15; 겔 8: 18).  이와 정반대로 하나님께서 의롭고 착한 사람들의 기도는 들어 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시 145: 19; 잠 15: 29 참조).  그러므로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는 것이지요. 

 셋째로, 우주만물이 창조된 이래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이 떠진 경우가 없었는데 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이야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어>
 이 논쟁에서 소경의 반박은 단연 압권입니다.  소경의 부모도 지혜로웠지만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고 소경 역시 대단한 사람입니다.  소경은 모든 인간적인 모욕과 위협을 슬기롭게 극복해내면서 단 한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바리새인들에게 증거했습니다. 

 소경으로 나서 평생 앞을 보지 못하다가 지금 이렇게 볼 수 있다는 사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이 논쟁에서 말 잘하기로 유명한 바리새인들이 졌습니다.  그래서 34절에서 아주 졸렬한 방법으로 대응합니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오늘 여러분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잘 몰라도 괜찮습니다.  단 한가지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을 증거하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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