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

요한복음 강해설교(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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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1 15:36 조회3,3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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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강해설교(54):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거든' <요 10: 29-42>

 

오늘 말씀은 크게 세 가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에게 주어진 양들을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으시거든 믿지 말며, 만일 그 일을 하시거든 주님은 믿지 않아도 좋지만 그 일은 믿으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곤고한 일을 당했을 때 요한이 처음에 세례를 주었던 그 곳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르셨습니다.

 

 

 

1. 주님의 손에 붙들린 양들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29-30절).


 요 10장은 유명한 양과 목자의 비유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좋으신지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이런 목자가 돌보는 양들은 안전합니다. 행복합니다.

그리하여 그 누구도 그 양들을 주님의 손에서 뺏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런 주장을 하시는 데에는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① 선한 목자되신 주님께 양들을 맡기신 하나님은 만물보다 크십니다. 


 양들을 돌보라고 주님께 맡기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리떼나 그 어떤 무서운 세력들이 위해(危害)를 가해도 끄떡없이 막아내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양들을 주님께 맡겨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한다면 양들의 안전에 대한 확신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확신'(self-confidence)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에 대한 확신'(God-confidence)인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능력으로 양들의 안전을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함으로서 보호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목회자들에게 주어진 양들도 목회자들이 인간적으로 얻은 양들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양들입니다. 그러므로 양들을 돌볼 수 있는 진정한 능력은 목자에게 있지 않습니다.

양들을 맡겨주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② 선한 목자되신 주님과 양들을 맡겨주신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라는 주장은 신학적으로 복잡합니다.

흔히 삼위일체론적으로 설명해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HOMOOUSIA,' 동일본질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성부의 본성과 성자의 본성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이 하나라는 주장이지요.

 

그러나 이런 난해한 주장들보다 가장 손쉽게 성부 성자의 일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두 분 사이의 관계의 일치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랑과 순종의 일치로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는 사랑의 일치가 있었습니다. 이 사랑의 일치는 순종으로서 입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고 하나님 아버지 역시 아들 하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유대성은 십자가의 죽으심에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는데 아들 하나님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일치는 완벽한 사랑과 완벽한 순종의 일치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은 사랑의 일치에 있습니다. 이 사랑은 언제나 순종으로 열매 맺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2. 사람들이 주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하신 말씀 때문이 아니라 하신 일 때문입니다(31-39).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라고 주장하자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했습니다.

감히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주장은 신성모독죄가 되기 때문이었지요. 레 24: 16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신성모독죄는 투석형(投石刑)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율법입니다.

 

 돌을 들어 치려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주님은 세 가지 주장으로 맞섰습니다.

 

 

 ① 주님께서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서 선한 일을 많이 했는데 무슨 일로 돌을 들어 치려느냐는 것입니다(32절).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주셨고, 허기진 자들을 먹이셨고, 슬픈 자들을 위로해주셨습니다.

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이와 같이 선한 일을 하셨던 것이지요. 선한 일을 했으면 상을 주어야지,

거꾸로 돌을 들어 치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지셨습니다. 

 

 

 ② 주님은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유대인들은 즉시 대꾸합니다. 33절을 보세요.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 예수님께서 선한 일을 했기 때문에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고 자칭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신성모독죄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34-35절을 보세요. 유대인들의 반박에 대하여 예수님은 먼저 시 82: 6을 인용하시면서 대응합니다.

시 82: 6 말씀을 다 찾아 읽읍시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 예컨대 재판관은 하나님으로부터 판관으로서 부르심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을 심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재판관은 하나님을 대신한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할 수 있지요.

 

 

 이와 같이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으로부터 특정한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신한 작은 하나님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출 21: 1-6; 출 22: 9, 28 참조).

따라서 이렇게 성경이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왜 예수님께서 당신을 그렇게 주장할 수 없느냐고 항변을 하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자신이 특별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성별(聖別)된 분이라고 주장하십니다.

36절 말씀을 보세요.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물건이나 어떤 장소,

어떤 시간을 보통 것들로부터 따로 떼어놓아 성별시키는 것이지요. 예컨대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은 성별된 사람들입니다(대하 26: 18; 렘 1: 5 참조).

 

 

제단은 성별된 장소입니다(레 16: 19). 안식일은 거룩한 날로 성별된 아주 특별한 시간입니다(출 20: 11).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보통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성별되어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스스로 거룩해진 분도 아니며 스스로 이 땅에 오신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거룩해지신 분이시며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말은 결코 참람하거나

 신성모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 이제 이런 주장을 펴신 다음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결론이 중요합니다. 37-38절 말씀을 보세요.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예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만일 예수님께서 말만하시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행하시지 않을 경우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있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백 마디 말보다 소리 없는 하나의 행동이 무섭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다는 주장은 말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거룩하고 선한 행위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는 표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현란한 말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의 실천적 모습이 우리의 그리스도인 됨을 보여줍니다.

 

 

 

 3. 힘든 일을 만날 때마다 은혜 받았던 첫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40-42). 

 


 예수님의 주장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민하게 그들의 손을 벗어나 피하셨습니다.

위기일발(危機一髮)의 상황을 잘 모면하셨던 것이지요. 그런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셨는가가 중요합니다.

 

요단강 건너 쪽 요한이 처음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가서 그 곳에 머무르셨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단 강은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를 받으셨던 곳입니다. 세례를 받으신 후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왔던 곳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 17).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소명의 장소였지요.

 

 

 예수님은 곤고한 일을 만났을 때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바로 그 은혜의 자리로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사람들과 씨름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먼저 씨름하시려 했던 것이지요.

야곱이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만났을 때 베델로 되돌아갔던 것과 마찬가지였지요(창 35: 1-5).

 

 그렇습니다. 괴롭고 슬픈 일을 당할 때 처음 은혜 받았던 그 곳으로 돌아가십시오.

그 곳에 쉼이 있고 위로가 있습니다. 재충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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