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촌총화

바이블 시론- 오만과 편견을 버려야 (2014.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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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1 16:41 조회2,7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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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 가는 도중 전주에 들렀다.

그곳에는 호남에서 알아주는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이 있었다.

조선뿐만 아니라 청나라에까지 두루 알려진 추사를 초대해 글씨를 보여주며 평을 부탁했다.

대가에게 인정받으려는 소박한 동기였다. 촌티를 물씬 풍기는 글씨를 한동안 쳐다보던 추사는 무슨 모욕이나 당한 것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그때 창암은 추사보다 열여섯이나 더 많은 71세 노인이었다. 현장에는 창암을 최고의 명필로 흠모하는 제자들도 있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이 있다.

엘리자베스라는 당찬 중류층 아가씨와 귀족 청년 다아시가 결혼에 골인한다는 줄거리다.

어느 날 다아시는 일체의 신분질서를 무시하고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하지만 오만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하지만 다아시를 알면 알수록 그가 사려 깊고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결국 둘은 결혼한다. 다아시가 오만하리라는 편견을 엘리자베스가 깼기 때문이다.

오만과 편견이 참된 사랑과 소통을 얼마나 방해하는가를 보여주는 역작이다. 오만은 타인이 나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거꾸로 편견은 내가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든다.



오만하면 국민 사랑 못 받아



 작금의 정치현장에서 오만과 편견의 장벽은 너무나 높고 두터운 것 같다.

며칠 전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내외신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존에 강조했던 원칙적 소신을 특유의 논리정연함으로 똑 부러지게 밝혔다.

경제 혁신과 통일에 대한 의지가 확고해 보였다. 그럼에도 전반적인 회견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오만과 편견이라는 단어들을 떠오르게 했다.

자기 하고 싶은 말만 전달하고 국민들이 정말 듣고 싶어 하는 말은 하지 않은 것 같았다.



현 정권이 들어서기 전부터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불통 비판에 대한 반박 부분이 특히 오만스러워 보였다.

물론 소통에 힘쓰겠다는 말은 했지만 어디까지나 법과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과만 소통하겠다는 뜻으로 비쳤다.

이른바 떼쓰기와 같은 비정상적 관행을 일소하는 테두리 안에서만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집단적 이기심에 사로잡혀 불법 파업을 일삼아 온 관행들이 있었기에 충분히 수긍은 갔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이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리게 하려면 정부부터 먼저 비정상적인 것들을 바로잡겠다는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국가정보원의 정치공작이나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각종 개인 사찰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드물다. 무엇보다 야당을 대등한 국정 파트너로 여기지 않으려는 고압적 자세 역시 정상적이지 않다.

대선공약이었던 대통합에 대한 방안은 아예 제시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이번 기자회견의 기조는 현 정권을 지지하지 않았던 절반의 국민들에게 우리가 지시하는 쪽으로만 따라오라는 말처럼 들려왔다.



소통하려면 편견 넘어서야



 추사는 9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전주에 들러 이삼만의 묘소를 직접 찾아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혹독한 시련이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나게 했던 것이다. 왜 소통 논란이 계속되는가.

오만과 편견 때문이다. 오만을 버려야지 폭넓은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편견이야말로 우리네 삶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고질병이다.

탈무드에 나오는 말 그대로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모습대로 보기 마련이다.

인종, 지방색, 학력, 지위, 성 등등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인해 사물을 굽게 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정부 여당이 반대편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 이것을 넘어서지 않고는 진정한 소통을 이룰 수 없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말씀하셨다. 진리를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보려면 오만과 편견일랑은 버려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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