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촌총화

생활신앙의 착근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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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0 19:02 조회2,4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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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에 극동방송 초대석에 나가 신년 인터뷰를 했다. 아나운서가 물었다.

2007년도는 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을 맞아 영적 대각성이 이슈였는데 새해의 화두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무 생각 없이 ‘생활신앙의 착근’이라는 대답이 툭 튀어나왔다. 작년에는 각종 대규모 집회가 열렸었다. 물론 영적 대각성을 촉구하는 성회였다.

그러나 그 때만 반짝했지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신앙 생활은 하루 이틀 하고 그만둘 일이 아니다.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하듯이 몇 년간 열심히 하다가 집어치울 일이 아니다.

일생 동안 지속해야 할 일이기에 어려운 것이다.



대부흥 운동 100주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반짝했던 영성운동은 지양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과 접목이 되어야 한다. 날마다의 구체적인 삶속에 우리의 신앙과 예수정신이 녹아 흘러야만 한다.



내가 미국인 교회에서 목회하며 배운 가장 큰 교훈은 그들의 생활신앙이었다.

그리 요란스럽게 신앙생활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새벽기도도 통성으로 하는 철야기도도 없었고 일어서서 뜨거운 찬양도 잘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매일의 생활은 성실하고 정직하고 엄격했다. 신용을 잃고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사회였다. 내 것 네 것이 분명한 자본주의 사회였지만 내 것이 조금 넘쳐날 때 남에게 베풀 줄도 알았다.

금싸라기 같은 시간을 절약해 아무런 보상도 기대하지 않은 채 자원봉사도 많이 했다.



교회에서 배운 예수의 가르침이 가정과 직장과 사회생활에 고스란히 용해되었다. 이것이 미국 기독교의 보이지 않는 힘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국에 돌아와 목회해보니 참 좋은 것들이 한 둘이 아니다.

따뜻한 정이 있어서 좋다. 목회자에 대한 기본적인 리스펙트가 있어서 너무 좋다.

미국에서 배우고 준비했던 것들로 마음껏 기여할 수 있는 장(場)이 넓다는 것도 좋다. 그러나 아쉬운 것도 만만치 않다.

제일 먼저 신앙과 삶의 유리가 불만이다. 예수신앙이 일상생활 속에 침투하여 용해되지 않은 듯이 보인다.


신앙은 하나의 기호나 취미일 뿐 삶의 원칙이나 표준으로서 굳게 자리잡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교회 안에서는 참 좋은 신자인 듯 보이는데 밖에 나가서는 일반인들의 행태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속일 때에는 적당히 속이고 타협할 때에는 쉽게 타협한다.




하나님이 지켜보신다는 외경심이 별로 없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얼렁뚱땅 핑계 대고 합리화시키면서 그냥 그렇게 넘어간다.

나는 이것이 항상 염려요 불만이다.



 새해에는 한국이나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생활신앙을 정착시켜나갔으면 좋겠다.

기독교적인 정신이 온 몸에 배어서 세상 사람들이 그 향기에 도취했으면 좋겠다.

신앙생활은 한 두 해 하다가 그만 둘 일이 아니지 않는가. 한 때 반짝하고 타오르다가 흐지부지하느니 조금 둔하고 느려도 끝까지 한결같이 나아가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믿음은 혼자 최고인 것 같은데 생활 속에 열매는 하나도 맺지 못한다면 이 어찌 예수께서 저주하신 이파리만 무성한 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와 다르다 하리요.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그대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는가/

굽이 많은 이 세상 이 시냇가 여울을.”

도종환의 ‘깊은 물’이 노래하듯이 우리의 가슴엔 종이배 하나 뜨지 못하는 얄팍한 신자는 아닌지 치열한 성찰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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