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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 웨슬리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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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0 21:18 조회2,9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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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내리교회 예배당 역사는 유장하다. 1885년 인천에 들어온 아펜젤러가 입경하기 전 38일 동안 세내어 살던 초가집이 내리성전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1890년에 노병일이 건축한 회당 여섯 칸은 한국인의 손에 의해 지어진 최초의 예배당 중 하나이다. 1891년에 아펜젤러가 건축한 10평 남짓한 화이트 채플이 있고,

1894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여성 전용 예배당도 있다.



 제물포 웨슬리 예배당은 1901년 12월25일에 입당한 인천 최초의 서구식 개신교 성전이었다. 정동의 벧엘 예배당과 흡사한, 참으로 아름다운 붉은 벽돌 성전이었다. 그러나 선조들은 역사의식이 부족했다.

장소가 비좁고 더 큰 성전을 짓는다는 이유로 1955년 10월19일 웨슬리 예배당을 허물었다. 뼈아픈 실수였다.

한국 선교의 발상지 위에 세워진 역사적 예배당을 허물고 지어진 새 성전은 10년이 채 못돼 전소했다.



  인천시의 도움을 받아 웨슬리 예배당이 창조적으로 복원될 전망이다. 하와이 최초의 이민자 교육의 산실이요, 신문화 신교육의 요람이요,

1954년 한국 최초로 메시아 전곡을 연주했던 유서 깊은 예배당을 다시 볼 날이 멀지 않았다. 복원된 성전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선조들의 눈물어린 기도와 찬송을 기억하려고 한다.



 웨슬리 예배당의 건축을 주도한 존스 목사는 1901년 내리교회에 출석한 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노인은 궁색하기 짝이 없는 초가집에서 중풍으로 쓰러져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교회에 나왔다.

아들은 소문난 난봉꾼이었다. 교회의 도움을 받아 약간의 기력을 회복한 노인은 그 후 제 발로 걸어서 교회에 나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제일 먼저 교회에 도착했고 제일 늦게 떠났다.

어머니의 신앙에 감화를 받은 망나니 아들 역시 교인이 되었다.

병이 깊어져 교회에 못 나올 때에도 교회 권사가 방문하면 아들을 불러 벽에 걸려 있던 전대에서 돈을 꺼내 자기 이름으로 헌금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세상을 떠날 때에는 "아들아, 무슨 일이 생겨도 예수를 버리지 말라"고 유언을 했다고 한다.



 내리 교인들이 벽돌 드리기 운동을 시작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벽돌이 되어 주의 몸된 성전으로 세워지고자 함이다. 돼지 저금통에 동전을 가득 모아 바친 어린이, 곗돈을 타서 전액을 드린 이,

금반지 목걸이 팔찌 등의 패물을 바친 이, 3억2000만원을 단번에 바친 이,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줄을 잇고 있다. 앞에서 말한 할머니의 신앙 유산을 이어가려는 열성들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켜온 초대 교인들의 얼을 본받고자 함이다. 이제 복원될 웨슬리 예배당은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며 지치고 상한 영혼들을 품어주는 어머니 교회, 영혼의 고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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