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촌총화

빛과 자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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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0 21:34 조회2,3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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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꿈의 계절,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 4월이 왔다.

혹자는 잔인한 계절이라고도 했지만 한국 개신교를 위해서는 축복의 계절이었다. 1885년 4월5일 오후 3시, 음산한 봄비가 뿌리는 가운데 미 북감리회의 아펜젤러 부부와 북장로회의 언더우드가 제물포 항에

 첫 발을 내디뎠다. 한국에서의 공식적인 개신교 선교가 출범하는 순간이었다. 본래 일본 선교를 꿈꾸었던 아펜젤러와 인도 선교를 희망했던 언더우드가 은둔의 나라에 나란히 들어왔다.

아무도 이 27세의 새 신랑과 26세의 총각이 한반도의 역사를 새로 쓰게 할지 몰랐다.

그러기에 환영하는 이들도 없이 두 사람의 역사적인 제물포 상륙은 부슬부슬 비까지 내리는 중에 너무나 쓸쓸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아펜젤러가 17년 동안 이룬 선교적 성과는 눈부신 것이었다.

성서번역, 학교설립, 신학교육, 교회개척 등등 한국 감리교회의 초석을 다졌다.

그러나 그를 더더욱 빛나게 한 것은 그의 이타적 죽음이었다. 1902년 6월11일 밤,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탔던 작은 증기선 구마가와마루호가 기소가와마루호와 정면 충돌했다.

배가 침몰할 때 수영선수 출신이었던 아펜젤러는 동승했던 비서와 여학생의 안전을 먼저 생각해서 그들을 찾아 헤매다가 구조받을 기회를 놓쳤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요15:13)는 주님의 말씀을 이루는 순직의 순간이었다.



 언더우드 역시 학자요, 교육자요, 성서번역자요, 교회일치 운동가로서 경이로운 업적을 남겼다.

그는 신혼여행도 전도여행으로 떠날 만큼 선교적 열정에 불타 있었다. 무엇보다도 언더우드는 초교파 연합운동에 매우 관대한 정신을 보였다.

1886년 7월18일 한국 최초로 알렌의 어학선생이었던 노도사(노춘경)가 세례를 받았을 때 언더우드가 주례했고 아펜젤러가 보좌했다.

주한 외국인을 위한 서울연합교회(Seoul Union Church)를 설립했을 때에는 언더우드가 담임목사직을 아펜젤러에게 양보했다. 실로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서 이들에게 교파간의 차이는 미미한 것이었다.



 오는 4월5일 인천에서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제물포 입항을 기념하는 제1회 선교문화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두 사람의 입항 모습도 재연할 예정이다. 온 마음과 몸을 아낌없이 바친 그들의 숭고한 선교정신을 기리고 잇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우리는 부활절에 여기에 닿았습니다. 이 날 죽음의 철장을 꺾으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빛과 자유로 인도해주소서!”

                                                                                                                                                      (아펜젤러의 제물포 도착 직후 미 감리교 선교부에 보낸 서신 말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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