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촌총화

낮은 곳에 희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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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1 14:20 조회2,2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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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베이징에 다녀왔다. 4박5일 간의 단기선교였다. 중국 하면 우리보다 못 산다는 편견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통념은 틀리지 않았지만 베이징의 중심부는 달랐다.

올림픽을 앞두고 치밀하게 준비한 흔적이 역력했다. 뉴욕이나 파리가 무색할 정도의 거대한 빌딩들이 빼어난 풍채를 자랑하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유학한 테크노크라트들이 중국의 자존심을 내세우기 위해

만든 기획 작품들임에 틀림이 없다. 놀라운 자본주의적 변화 속에서 톈안먼 광장을 내려다보는 마오쩌둥의 초상화만이 중국이 여전히 공산권 국가임을 실감케 했다.



천년 고도를 상징하는 만리장성, 자금성, 이화원, 대표적인 고적지만 몇 군데 돌아봤지만 그 규모가 웅대했다. 그 옛날 조선과 같이 작은 나라에서 조공을 드리러 갔을 때 얼마나 기가 죽었겠는가를 생각하니

사대주의가 절로 이해됐다. 중국은 역시 대단한 나라라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인구가 많아서 노동력이 풍부하니 아이디어만 있으면 어떤 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주변부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베이징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외곽의 한 허름한 농장을 빌려 만든 신학교에 갔다. 한때 공안 당국의 추적을 당해 탄압을 받은 적이 있기에 거미줄 같은 미로를 헤쳐

한참을 달려가야지만 간신히 찾을 수 있는 은신처였다. 대부분 20대의 남녀 학생들이 반반씩 30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중졸이 평균학력이고 간간이 고졸이나 전문대 출신들이 섞여 있었다.

교실은 전란 직후 폭격 맞은 듯 초라했고 앉은뱅이 책상에다가 거적을 깔아서 만든 자리 위에 앉아 강의를 들었다. 대여섯 명이 함께 자는 기숙사는 침대 형태의 돌단 위에 이불을 깔고 간신히 몸만 빠져

나올 정도였다. 음식도 하루 종일 흰쌀밥에 감자무침이 유일한 반찬이었다.



다들 빈티가 철철 넘쳐흘렀고 손바닥은 농사일에 시달려서인지 여성임에도 거칠었다. 그러나 눈빛 하나는 맑고 빛났다. 찬송과 기도는 몇 시간이라도 할 수 있을 만큼 뜨거웠다.

학생들의 수준을 고려해서 쉽게 강의를 했지만 듣는 태도는 사뭇 진지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공책에 받아 적었다. 그렇다. 신앙과 향학열 때문에 10시간, 15시간 기차를 타고 당국의 감시를 따돌리고

그곳을 찾은 순수 청년들이었다.



그 새 정이 들었는지 떠날 때에는 몹시 서운했다. 베이징 공항을 떠나 인천에 올 때까지, 아니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마천루 스카이라인이나 찬란한 유적지가 아닌, 그 청년들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눈망울

만 생각난다. 아무래도 중국의 희망은 높은 곳이 아닌 낮은 곳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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