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

욥기 강해설교(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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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1 16:40 조회5,5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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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발의 첫 번째 공박: "들나귀 새끼같이 미련한 이여"
<욥 11: 1-20>

 


 본문 말씀은 셋째 친구인 소발이 욥을 공박한 말입니다.

세 친구가 욥에게 말을 건네는 모습을 보면 각자의 성품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누가 네게 말을 걸면 너는 짜증스럽겠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다"(4: 2). 엘리바스가 시작한 말입니다.

 "언제까지 네가 그런 투로 말을 계속할 테냐? 네 입에서 나오는 말 거센 바람과도 같아서 걷잡을 수 없구나"(8: 2). 빌닷의 말이지요.

 

 

 그 다음에 본문 2-3절 말씀을 보세요. "네가 하는 헛소리를 듣고서, 어느 누가 잠잠할 수 있겠느냐? 말이면 다 말인 줄 아느냐?

네가 혼자서 큰소리로 떠든다고 해서, 우리가 대답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네가 우리를 비웃는데도, 너를 책망할 사람이 없는 줄 아느냐?" 소발이 한말입니다.

그 강도를 놓고 볼 때 소발이 한 말이 가장 과격합니다.

 

 

따라서 엘리바스가 비교적 점잖은 사람처럼 보이고, 빌닷은 조금은 더 정죄하는 스타일의 사람처럼 보이고,

소발의 감정이 가장 격하고 오만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욥이 하는 말을

 쭉 듣고 있다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일축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소발이 던진 발언의 요점은 인간의 제한된 지혜로서는 감추어져 있고 무한한 하나님 지혜의 신비를 다 헤아릴 수 없으므로

쓸데없는 변론을 즉각 중단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면 운명을 뒤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 대(對) 제한된 욥의 지혜(11: 2-12)



 소발이 욥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참을 수 없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바로 욥 스스로가 죄 없다는 결백성의 주장이었습니다.

소발이 볼 때 어리석은 인간이 짧은 지혜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와 무죄성을 주장하는 것이 주제 넘는 일입니다.

 

 

 

 4-6절을 보세요. "너는 네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고 주님 보시기에, 네가 흠이 없다고 우기지만, 이제 하나님이 입을 여셔서 네게 말씀하시고,

지혜의 비밀을 네게 드러내어 주시기를 바란다.

지혜란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네게 내리시는 벌이, 네 죄보다 가볍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 보세요. 소발은 먼저 세 가지를 지적합니다.

 

첫째, 욥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흠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가당치 않다.

둘째,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아둔한 머리로 헤아리기에는 너무 어렵다.

셋째, 하나님께서 욥이 지은 죄에 응당 받아야 할 벌보다 가벼운 벌을 내리신다.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런 말이 될 것입니다.

욥이 아주 짧은 지혜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숨겨진 무궁무진한 지혜의 빛에서 볼 때 어이없는 짓이며,

하나님의 지혜로 조명해 볼 때에도 욥은 오히려 당연히 받아야 할 벌보다 가벼운 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친구치고는 아주 과격하고 직설적인 언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 이런 관점에서 7-12절 말씀을 보세요. 소발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의 4차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늘보다 높고(높이), 스올보다 깊고(깊이), 땅 끝까지의 길이보다 길고(길이), 바다보다 넓다(넓이)는 것입니다(8-9절).

 

 

 

이 말씀은 엡 3: 18절에서 언급한 그리스도 사랑의 4차원성을 연상시키지 않습니까?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지혜도 그 높이와 깊이와 길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소발이 이와 같이 무제약적인 하나님의 지혜를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욥의 어리석은 지혜와 비교하기 위함이지요.

바로 앞장에서 욥은 빌닷에게 대꾸하면서 하나님 창조의 선한 목적과 의미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소발이 보기에 욥의 어줍잖은 지혜로 하나님 창조의 신비, 운운한다는 것이 가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7절 말씀을 보세요. "네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알아낼 수 있느냐? 전능하신 분의 무한하심을 다 측량할 수 있느냐?"

 무한하고 신비한 하나님의 지혜 앞에 감히 욥이 명함도 내밀 수 없다는 일갈이지요.

 이제 하나님의 지혜 앞에 선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겠느냐는 물음 앞에서의 무지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 앞에서의 무능 밖에는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11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잘못하는지를 분명히 아시고, 악을 보시면 곧바로 분간하신다."

욥이 자신의 죄에 관해서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혜와 분별력이 넘치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결국 소발이 보기에 욥은 미련하기 때문에 자기 결백을 주장하고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사실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세요. "미련한 사람이 똑똑해지기를 바라느니 차라리 들나귀가 사람 낳기를 기다려라."

 소발은 욥을 미련한 사람, 원어대로 하면 골이 '텅빈 사람'인데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지혜롭기 되기는 아예 들나귀가 사람을 낳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해버립니다.

 

욥은 선천적으로 골이 빈 사람이기에 지혜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소발의 단정은 얼마나 가혹한 말인지요? 

 

 

 

 2. 회개냐? 고집이냐?(11: 13-20) 



 이렇게 무섭게 욥을 몰아 부치던 소발이 이제 욥에게 미래의 회복 가능성에 대해서 권고합니다.

엘리바스나 빌닷이나 소발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셋 다 욥을 심문하고 정죄한 뒤 반드시 미래에 대한 해결책도 함께 제시한다는 사실입니다

(5: 8 이하; 8: 5-7 참조).

"병주고 약준다."는 속담 그대로이지요. 무엇보다도 소발이 제시한 해결책은 빌닷이 준 충고, 이른바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그러면 욥이 어떻게 해야지만 회복될 수 있습니까?

 

 

 

 13-14절 말씀을 보세요. "네가 마음을 바르게 먹고 네 팔을 그분 쪽으로 들고 기도하며,

악에서 손을 떼고, 네 집안에 불의가 깃들지 못하게 하면." 여기 보세요. 욥이 지금 당하는 고난의 삶을 청산하고

 서광이 비치는 미래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의 자세와 행실을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마음을 바로 정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그런 다음에 죄악에서 떠나 불의를 청산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어떤 축복이 기다립니까? 15-19절 말씀을 보세요. 부끄럼 없이 얼굴을 들 수 있으며 편안해져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될 것이며

 괴로운 일을 다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둠이 물러가고 아침 같이 환한 세상이 펼쳐질 것이며 희망에 가득차 아무 걱정거리가 없이 자리에 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욥이 자기의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기만 하면 소망과 안식을 회복할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만일 욥이 고집을 부리고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20절을 보세요.

"그러나 악한 사람은 눈이 멀어서, 도망 칠 길마저 찾지 못할 것이다. 그의 희망이라고는 다만 마지막 숨을 잘 거두는 일뿐일 것이다."

 만일 욥이 악인의 길을 계속 고집할 경우 눈이 어두워 도망칠 길 마저 찾지 못하고 쓸쓸히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우리가 욥기를 읽을 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욥과 세 친구들의 논쟁편입니다.

 언뜻 보아서는 세 친구들이 훨씬 더 신앙적으로 보이고 옳은 말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에 욥은 불신앙적이고 지나치게 도전적이고 불순종적인 것처럼 비칩니다.

 

 

이러한 피상적인 느낌은 욥이 세 친구들과 더불어 세 바퀴 논쟁을 벌이는 내내 계속됩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면 하나님께서 친구들이 아닌 욥의 손을 들어주십니다(42: 7 참조). 다시 말해 옳다 인정받은 사람은 욥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께서 비록 옳은 논리를 가졌더라도 선생인 냥 정죄하는 사람들이 아닌 욥과 같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반항적이고 전투적인 탄식까지도 다 받아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닐까요?

 

 

 

 우리는 친구들에게서 교사적인 냄새, 율법주의적 취향을 강하게 느낍니다. 이들이 던지는 말은

오랫동안 전수되어 내려온 지혜의 보고에서 나온 말이기에 거의 다 옳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점은 친구가 얼마나 큰 아픔을 겪고 있는가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하다는데 있습니다.

이들은 인과율로 욥이 당하는 고난의 문제를 풀어보려 했지만 욥은 자신의 고난이

그와 같은 고전적인 이론만으로 쉽게 해결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생각에서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를 보입니다.

 

 

 

이것은 신앙 없는 교만과 불순종의 소치가 아니라 하나님을 진실로 대면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적어도 그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자녀요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인격 존재로 여기신 세리와 창기들을 그냥 율법적인 전통을 따라

 죄인들로 보았습니다. 그들의 말은 옳았지만 그들의 시각과 삶이 하나님을 닮지 못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에게는 욥과 같은 실존적인 고통의 경험 없이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으로 해석하고 정죄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려고만 합니다.

여기에 친구들과 욥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있습니다.

 

 

 

 소발의 말도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혜롭다 한들 어떻게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지혜를 당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욥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이의를 제기한다한들 어찌 하나님의 숨겨진,

신비한 지혜까지 다 헤아릴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제 12장에서 드러나겠지만 소발이 지적하는 것처럼 욥이 자기 지혜의 연약함을 모르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욥의 탄식과 저항은 견딜 수 없이 깊은 고난의 심연에서 분출되어 나온 자연스러운 반응일 뿐입니다.

 

 

 

그의 탄식은 어떤 지식이나 교리나 객관적 관찰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처절한 고난의 현장 한가운데에서 자연스레 쏟아져 나온 인간의 반응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담학에 있어서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자기의 고통을 다 털어놓고 하소연만 할 수 있어도

 웬만한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욥도 더욱 더 온전하고 성숙한 신앙 인격으로까지 올라가기 위해서

 이와 같은 탄식과 항의와 절규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결국 소발의 공박을 읽으면서 어설픈 논리로 고난당하는 이웃의 아픔을 해석하고 정죄하는 것보다

진지한 공감과 정직한 침묵이 훨씬 더 낫다는 사실을 또 다시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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