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

요한복음 강해설교(53)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1 15:31 조회5,722회 댓글0건

본문

요한복음 강해설교(53): "주장과 약속" <요 10: 22-28>

 

요 10장은 유명한 '양의 우리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양들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버릴 정도의 선한 목자일 뿐 아니라

양문(羊門)이신 예수님을 드나들 때 구원과 풍성한 꼴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1. 시간: 겨울철 수전절


 이제 본문 말씀은 국면이 전환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충돌을 다루고 있는데

보기 드물게 시간과 장소를 정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22절에 보면 이 사건이 수전절(修殿節)에 일어났는데 추운 겨울이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유대인들이 겨울철에 지키는 수전절은 어떤 절기일까요?

 

 표준 새번역 성경을 보면 수전절을 '성전 봉헌절'(the Festival of the Dedication)로 번역해놓았습니다.

수전절보다는 조금 더 정확한 번역이 아닌가 싶습니다.

 

수전절은 다른 말로 '빛의 축제'(the Festival of Lights)라고도 불리는데 유대인들은 '하누카'(Hanukkah)라고 흔히 부릅니다.

유대인들의 달력으로 치스레브(Chislev)라고 부르는 달의 제 25일에 지키는 절기이지요.

그런데 치스레브는 우리 달력으로는 12월이니, 12월 25일, 즉 크리스마스 시즌에 근접해 있으며,

유대인들이면 누구나 전 세계적으로 지키는 명절입니다.

 

 

 그런데 수전절에 얽힌 아주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주전 175년부터 164년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Antiochus Epiphanes)라는 시리아 왕은 희랍적인 것에 열광한 희랍메니아였습니다.

그는 희랍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좋아했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모든 유대 종교의 잔재들을 없애고 희랍 문화와 종교를 널리 유포시키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유화적인 방법으로 그렇게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노골적으로 유대교를 박멸하고

각종 희랍 신들과 희랍종교를 팔레스타인 전역에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심한 반감을 가지고 안티오쿠스 왕의 희랍화 정책에 저항했습니다.

 

 

 주전 170년에 안티오쿠스는 예루살렘을 침략해서 8만 명의 유대인들을 죽였으며,

수많은 유대인들을 노예로 끌고 갔습니다. 더욱이 성전 금고에 있던 돈 1,800 달란트를 훔쳐 갔습니다.

 

 

그 당시 1 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이 15년 동안 일해야지만 얻을 수 있는 수입이기에 엄청난 혈세를 약탈해 갔던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율법서를 지니고 있거나 어린 아이에게 할례를 주는 것은 사형에 해당되는 금기(禁忌) 사항이 되었습니다.

예컨대 어린 자식들에게 할례를 주려고 했던 어머니들은 십자가형에 처해졌으며 할례받은 아이들은 교수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더럽혀졌고 성전 방들은 술집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안티오쿠스는 마침내 번제를 드리는 제단을 제우스신에게 제물을 드리는 제단으로 변형시켜서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돼지고기를 이방신들에게 제물로 바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유대교의 정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을 바로 그 때에 유다스 마카베우스(Judas Maccabaeus)와

그의 동생이 일어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주전 164년에 독립투쟁은 마침내 승리로 끝났습니다. 바로 그 해에 성전은 다시 정화가 되었습니다.

3년 동안의 대대적인 성전 오염 끝에 예루살렘 제단은 다시 수축되고 성의(聖衣)와 거룩한 제기(祭器)들이 다 제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전절은 말 그래도 성전을 다시 수리한 절기라는 말이요,

성전을 다시 정화시켜서 하나님께 봉헌한 축제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마카베우스는 "제단을 봉헌하는 날들은 치스레브, 즉 12월 25일부터 시작해서 8일 동안 기쁨과 즐거움으로 지켜야만 한다."

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하여 수전절은 성전 정화를 기념하기 위하여 8일 동안 축제를 벌였던 절기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수전절은 '빛의 축제'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날 예루살렘 성전뿐만 아니라 온 유대인들의 집에는 불빛을 환하게 밝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대인 가정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창문마다 환하게 등불을 밝혀두는데,

모두 8개의 불을 켰다가 하루마다 불 하나를 꺼서 마지막 날 불빛 하나만 남게 합니다.

혹은 반대로 처음에 한 개의 불빛만 켰다가 하루에 하나씩 켜서

마지막 8일째에는 8개의 불빛이 유대인들의 가정마다 환하게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수전절에 불을 밝히는 풍속은 두 가지 점에 있어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이 빛들은 이스라엘이 자유를 되찾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빛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8월 15일을 광복절(光復節)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36년간 일제 치하에 빛을 잃고 있다가 빛을 되찾았다는 그런 의미와 같은 이치이지요.

 

 

 둘째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성전이 다시 정화되어 7개의 촛대에 다시 불이 켜졌을 때 오염되지 않은 기름을 담은 오직 하나의 작은 항아리만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 항아리는 그 때까지 아무도 손대지 않았으며 대제사장의 반지를 인장으로 눌러 봉해놓은 채로 남아있었습니다.

이 항아리에는 단 하루 동안만 등에 불을 밝힐 수 있는 기름이 남아 있었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꼭 하루만 등을 밝힐 수 있는 기름이 무려 8일 동안이나 지속적으로 등불을 켤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8일 동안 성전과 유대인들의 가정에 등불을 켜는 풍속은

바로 그 항아리 속에 담겨져 있던 기름을 기념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바로 이와 같이 대낮같이 불빛이 환한 절기에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2. 장소: 성전 안 솔로몬 행각



 그 다음에 장소 문제입니다. 24절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 거닐고 계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의 행각은 어떤 곳입니까? 행각(行閣)이란 말은 주랑(柱廊)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성전 경내의 첫 번째 뜰은 '이방인들의 뜰'(the Court of the Gentiles)로 불립니다.

 

이 '이방인들의 뜰'의 양쪽을 따라서 '왕의 행각'(the Royal Porch)과 '솔로몬의 행각'(Solomon's Porch)이라고 불리는

장엄한 열주(列柱)들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줄을 서서 있는 이 기둥은 높이가 거의 40피트나 되고 위에는 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하거나 명상할 때 이 기둥 사이를 거닐었습니다. 랍비들은 제자들에게 뭔가를 가르칠 때 이 주랑에 거닐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이 주랑에 거닐고 계셨을 때 유대인들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3. 유대인들의 질문: "당신은 그리스도입니까?"



 언제까지 자기들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분명히 대답을 해주십시오.

이 질문에는 유대인들의 두 가지 태도가 깔려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에 대하여 진실로 무엇인가 알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그런가 하면 둘째로, 예수를 잡으려고 하는 흑심을 품고 질문을 던지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을 올무에 몰아 넣어 신성모독죄로 유대적인 재판을 받게 하던지 아니면

반역죄로 몰아 로마 정부로부터 심문을 받게 할 음모를 품고 졸렬한 질문을 던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4. 예수님의 대답: "내가 이미 말했음에도 믿지 않는다."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로, 예수께서 이미 그들에게 말씀했지만 그들이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비록 은밀한 가운데이기는 하지만, 두 가지 주장을 이미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라고 주장하셨습니다(요 4: 26).

 또한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실로암 연못에서 고침받은 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주장하셨습니다(요 9: 37).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으로든 행위로든 의심할 나위 없이 확실히 주장하신 것이 두 가지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행위를 통한 메시아 주장인데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이 이미 메시아가 오셨다는 주장입니다.

 

사 35: 5-6은 말씀합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예수님의 행위를 통하여 메시아 시대에 이루어질 이와 같은 비전이 이미 현실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한 주장입니다. 신 18: 15은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또한 마 7: 29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권세가 있어서 서기관과 같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모양이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이와 같이 말씀과 행위를 통하여 예수님 스스로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이미 주장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 대부분은 예수님의 주장을 진리로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속한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정확하게 알아차립니다.

유대인들의 예수님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을 배척했던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주님의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7절에 주님은 주님의 양들이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주님은 주님의 양들을 알고,

 주님의 양들이 주님을 따른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의 양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양들만이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예수님의 뒤를 따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당신에게 속한 양들에게 세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28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님께 속한 양들은 세 가지를 누리게 된다고 약속하십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영원히 멸망치 않는데,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것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양들을 예수님으로부터

빼앗아갈 수 없는 견고하고도 안전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과 행위로 당신의 메시아 되심을 주장하십니다.

 예수님께 속한 양들만이 그 주장을 진리로 받아들여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뒤를 따르는 양들에게 영생과 멸망을 모르는 삶과 안전을 약속해 주십니다.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