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설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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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1 15:51 조회10,44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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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바라는 것 없이도?"
<욥 1: 1-22>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이 세상에 왜 악과 고난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참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질문을 조금 더 확대하면, “왜 하나님 잘 섬겨 의로운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거꾸로 말해서 “왜 하나님 섬기지 않고 의롭지도 못한 사람들이 형통하느냐?"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선하시기는 한데 무능하신 까닭에 악과 고난을 막을 힘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기는 한데 사악하신 까닭에 얼마든지 악과 고난을 막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로 악과 고난을 허락하신다. 이 두 가지 가능성 중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느 것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신봉하는 하나님은 반드시 전지전능하시면서 동시에 선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욥기는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 당하는 애매한 고난, 까닭을 알 수 없는 신비한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욥'이라는 이름의 아카드어 어원은 “하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핍박당하는 자'라는 의미도 가집니다.
결국 욥기는 부당한 핍박을 받으면서 “도대체 내가 믿는 하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신가?"라는 실존적 물음을 던지는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당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의로우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지요.
그러나 욥기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한 질문들--예컨대 인과응보론, 참된 우정, 상담,
하나님의 자유와 초월성, 관념과 실천적 경험의 대결, 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그 심층적인 의미를 파헤치는 일에 함께 나설 것입니다.
욥이 실존 인물이었는지 가공의 인물인지, 기록된 시기와 장소가 어딘 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가운데 수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은 우리가 대답할 사안이 아니기에 우리는 욥이 족장시대의 실존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 가지고 이 책의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욥기는 1: 1-2: 13절까지의 서막과 42: 7-17절까지의 종장 부분이 산문으로 되어 있고 그 사이에 끼어있는
욥과 세 친구들과의 논쟁, 욥과 하나님과의 대화 부분은 운문, 즉 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거의 대부분이 질문과 응답 형식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1-5절에서 욥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하여 욥의 신앙과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둘째, 6-12절에서 욥에 관하여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일어난 천상회의가 나옵니다.
셋째, 13-22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첫 번째 시련에 대한 욥의 반응을 기술합니다.
1. 순전한 사람 욥(1: 1-5)
1절에 보면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도덕성은 우연히 길러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서부터 온 것입니다.
잠언 1: 7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는데 욥이야말로 하나님을 경외해서 악을 범하지 않는 지혜를 갖춘 사람입니다.
도덕적인 사람이 항상 영적인 것은 아니지만, 영적인 사람은 반드시 도덕적인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진정한 영성, 경건성은 언제나 도덕성, 윤리성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욥은 영성과 도덕성, 경건성과 윤리성을 겸전한 사람이었습니다.
2-3절을 보면 욥은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아들이 일곱, 딸이 셋, 자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일곱 아들은 언제나 가장 이상적인 자녀 축복을 상징합니다
(삼상 2: 5; 룻 4: 15; 렘 15: 9 참조).
그런데 일곱 아들에다가 세 딸을 더 두었으니 욥은 족장으로서 큰 자녀복을 얻은 사람이지요.
게다가 그는 경제적인 번영을 이룬 사람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재산가는 단연 가축을 많이 거느린 사람입니다.
욥은 양이 7천마라, 낙타가 3천 마리, 소가 5백 쌍, 암나귀 5백 마리에다 수많은 종들도 소유했습니다.
이렇게 자녀나 가축과 관련된 숫자를 보면 3 + 7 = 10, 5 + 5 = 10이라는 풍성함을 상징하는 숫자 10이 부각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욥은 동방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아주 으뜸가는 부자로 추앙받았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도덕적으로 무흠한 사람이었기에 이와 같은 축복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이러한 축복을 누리니까
하나님을 경외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중요한 것은 다음에 나오는 천상회의에서 사탄은 이와 같은 축복을 받은 까닭에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냐며 시비를 겁니다.
이제 4-5절을 보면 욥은 신앙과 행위, 경건성과 도덕성, 영성과 윤리성이 완벽하게 결합된 동방의 의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경건성뿐만 아니라 자녀들까지도 세심하게 챙겼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욥의 일곱 아들들이 돌아가면서 누이들을 함께 초청해서 생일잔치를 거나하게 베풀었습니다.
잔치가 끝난 다음 날 아침이면 욥은 일찍 일어나 어김없이 자식의 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혹시라도 자식들이 잔치가 끝난 다음에 하나님 앞에 알고도 모르고도 죄를 범할 수 있기에 그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욥은 이렇게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경건과 윤리성까지 예민하게 살피는 신중한 가장이었습니다.
2. 첫 번째 천상회의: 욥에게 닥친 엄청난 시련(1: 6-12)
이와 같이 분에 넘치는 복을 누리던 욥에게 어느 날 갑자기 시련의 순간이 들이닥칩니다. 불행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고 했는데
너무나 어이없이 고난은 어느 날 순식간에 욥의 가정을 덮쳤습니다.
하루는, 즉 정월 초하룻날 그 해의 길흉화복을 정하기 위해 하나님과 사탄이 천상에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상 여기저기를 다녀온 사탄에게 욥에 대해서 물으십니다. 8절을 보세요.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깊은 경건성과 높은 도덕성을 칭찬하십니다.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보았느냐? 이 세상에는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께서 욥을 극찬하시는 소리를 듣고 사탄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9-11절을 보세요. “그러자 사탄이 주님께 아뢰었다.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주님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울타리로 감싸 주시고, 그가 하는 일이면 무엇에나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를 온 땅에 넘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라도 주님께서 손을 드셔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치시면,
그는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욥의 믿음이 아무 조건도 없고 이유도 없는 순전한 믿음인지 아닌지 한번 테스트해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이 욥의 순전한 믿음에 대해서 내기를 한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울타리'라는 말이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울타리가 되어 주셔서 복을 넘치도록 부어주시고 지켜주시니까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지
그 울타리를 허물면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말 것이라는 유혹입니다.
또 한 가지 매우 중요한 말이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욥기가 승부를 걸고 있는 주제가 바로 이 보상 없는 신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 잘 믿고 저렇게 경건한 모습으로 사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가지가지 복 때문이지 아무 까닭 없이,
사욕 없이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여러분, 이것은 참 중요한 물음입니다. 우리가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을까요?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악을 허락하시고 견딜 수 없는 고통거리를 주시는데도 여전히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순종할 수 있을까요?
아무 보답을 바라지도 않고 아무 징벌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롭고 허허로운 상태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요?
불의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아무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한결같이 믿을 수 있을까요?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섬긴다, 이것은 샤머니즘이 가져다 준 기복신앙이요 물물교환식 신앙이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욥기가 던지는 매우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의 형편과 아무 상관없이, 아무 바라는 것도 없이
순전히 하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할 수 있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그런데 욥기에서 욥을 사이에다 두고 하나님과 사탄이 내기를 걸어서 도달한 결론은 아무 바라는 것이 없이도,
아무 조건 없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이것을 긍정하셨고 실제로 욥이라는 구체적인 인물의 삶을 통하여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와 같은 사심 없는 신앙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가 내기에서 지고 맙니다.
보상 없는 신앙이 불가능하다고 두 번씩이나 시비를 걸었던 사탄은 끄떡도 하지 않고
이러한 신앙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준 욥의 실상을 확인하고서는 그 때부터 욥기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적어도 사욕 없는 신앙의 가능성에 관해서 사탄이 내기에서 완전히 패퇴하고 만 것이지요! 이와 같이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의 신앙,'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 ‘까닭을 따지지 않는 신앙,' ‘실리를 추구하지 않는 신앙’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을 모든 값싼 축복의 종교들, 싸구려 샤머니즘 신앙으로부터 구별시켜주는 보배인 것입니다!
3. 첫 번째 시련과 욥의 반응(1: 13-22)
이제 천상회의가 끝나자마자 욥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찾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시련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련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궁극적 원인은 하나님께 있지 사탄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인간 세계를 감찰하며 인간을 하나님께 고소하는 세력은 될 수 있지만 악과 고난을 허락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욥의 시련은 시종일관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고 계시며 사탄은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한 편의 드라마가 됩니다. 그렇다면 욥에게 어떤 시련이 닥쳤습니까?
흥미로운 것은 2-3절에서 소개한 욥의 소유물들에 대한 서술과 정반대 순으로 재난이 닥칩니다.
소개할 때 맨 나중에 언급된 소와 나귀에게 가장 먼저 닥칩니다.
그 다음엔 작은 가축과 낙타에게,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욥의 자녀들에게 일어납니다.
이것을 가해자의 순서대로 정리하면
첫째로, 스바 사람들이 갑자기 쳐들어 와서 가축들을 빼앗아 가고 종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둘째로, 하늘에서 하나님의 불이 떨어져 양 떼와 목동들을 살라 버렸습니다.
셋째로, 갈대아 사람 세 무리가 갑자기 나타나 낙타 떼를 다 끌어가고 종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재앙은 항상 이중적으로 나타나는데, 먼저 가축에게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람에게 닥쳤습니다.
넷째로, 자녀들이 큰아들 집에서 한창 먹고 마시는데 갑자기 강풍이 불어와 집이 무너져 몰사하고 말았습니다.
자, 이와 같이 욥에게 전달된 재난의 소식은 네 경우 모두 홀로 살아남은 일꾼의 보고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일어납니다.
네 명의 일꾼이 욥에게 찾아와 보고 할 때 “다 죽고 저 혼자만 살아서 주인님께 보고를 드립니다."
하면서 이 재앙이 얼마나 긴박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또한 이 재난은 사람과 자연,
지상과 천상이 서로 교차하면서 일어난 총체적인 재앙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욥이 당한 재앙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축복을 하루아침에 고스란히 잃어버린 총체적인 재앙이었습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창졸간에 견딜 수 없는 고난을 겪은 욥은 다음과 같이 반응했습니다.
20-21절 말씀을 보세요. “이 때에 욥은 일어나 슬퍼하며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다음에,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경배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여기에 보면 첫째로, 욥은 일어나 슬퍼하며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깎습니다.
옷을 찢는 것, 머리털 혹은 수염을 미는 것은 극한 슬픔을 표현하는 전통적인 풍습이었습니다.
옷이 찢어짐 같이 자기의 마음이 찢어진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지요. 머리털을 깎음으로서
정상적인 생활에 마음을 둘 수 없을 만큼 상처가 깊다는 것을 또한 보여줍니다.
둘째로, 그런 다음 욥은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경배하면서 두 가지 격언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으니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
주신 분도 주님이시오,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도 있듯이,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인생의 진리를 다시 한번 되뇌면서 자신의 소유를 비록 다 잃어버렸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고백합니다.
또한 욥은 자신에게 복을 주시고 거두어 가시는 복의 주체가 누군 지에 대해서도 분명히 고백합니다.
그리하여 욥은 엄청난 재앙 한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신앙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탄이 시비를 걸었던
사심없는 신앙의 테스트에 합격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22절입니다.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욥은 비록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을 만나 극한 슬픔을 나타내기는 했지만 범죄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4.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이제 사탄이 하나님께 제기했던 물음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욥은 아무 바라는 것이 없이,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타리가 다 무너져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욥의 순전한 신앙, 즉 어떤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인간의 기대 심리를 투영해서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하나님을 조종하는 우상숭배를 배격하는 순수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통하여 이 가능성을 시종일관 믿으셨고 사탄은 믿지 않다가 내기에서 지고 맙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욥의 세 친구들이 줄기차게 주장하는 인과응보론이야말로 “착한 사람에게는 상을, 악한 사람에게는 징벌”이라는
단순 원리로 이처럼 보상 없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순수 신앙의 길을 방해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욥의 신앙을 통하여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위기 중에 하나인
기복주의 신앙, 값싼 싸구려 신앙을 극복할 수는 길을 모색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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