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설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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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1 16:01 조회9,09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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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탄식어린 독백: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을 것을"
<욥 3: 1-26>
욥이 그 엄청난 시련과 재앙을 겪고서도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탄이 욥 1: 9-11절에서 그토록 집요하게 물었던 질문들--"욥이 아무 바라는 것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리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울타리로 감싸주시고, 그가 하는 일이면 무엇에나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를 온 땅에 넘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라도 주님께서 손을 드셔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치시면,
그는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할 것입니다."--이 적어도 욥에게만큼은 무위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욥이 그냥 인내하며 하나님을 찬양만 했다면 욥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도 감정을 가진 인간이기에 슬퍼할 줄 알고 탄식할 줄 압니다. 욥 2: 13절 말씀을 보면 욥은 밤낮 7일 동안을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7일이 지난 뒤 욥이 마침내 입을 열어 자신의 슬픔을 적극 토로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찢어지는 아픔과 슬픔을 절절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욥이라고 해서 왜 감정이 없었겠습니까?
슬퍼할 줄 아니까 인간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부터는 도무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너무나 처절한 대재앙을 겪은
욥이 자신이 당한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따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크게 4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 도입부(3: 1-2)
1-2절은 시간의 경과뿐만 아니라 국면이 전환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가정과 자신에게 불어닥친 고난의 태풍 앞에 욥은 7일 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입을 열었다는 말은 욥이 비로소 아픔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사람은 너무나 끔찍한 일을 당하면 처음에 말문이 콱 막혀버립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망연자실(茫然自失), 멍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입을 열어 말한다는 것은 고통을 비로소 체감하기 시작하면서 왜 자기에게 이 엄청난 재앙이 찾아왔는지에 대한
이유와 의미를 적극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큰 고난을 당하여 그냥 입을 닫고 멍하니 있어서는 안됩니다. 입을 열어 말해야 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슬픔을 표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의 소리를 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2. 태어난 날과 잉태된 날에 대한 저주(3: 3-10)
이제 3절을 보세요.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과 자신이 '잉태된 그 밤'이 차라리 사라져버렸으면 하는 바램을 보이고 있습니다.
욥이 태어난 날과 잉태된 밤은 욥이 이 땅위에 존재하게 된 출발점인데 차라리 그 날이 없었더라면
욥이 이 고통을 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탄식입니다. 우리도 너무 괴롭고 힘들면 "차라리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하고
한탄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또한 4-6절 말씀을 보면 먼저 욥은 자신이 태어난 그 날이 창조 이전의 어둠의 상태로 되돌아가기를 바랍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여 하나님이 아니라 혼돈이 그 날의 주관자가 되었으면 하고 탄식합니다.
7-9절을 보면 욥은 자신이 잉태되던 그 날 밤이 차라리 아무도 잉태하지 못하는 불임의 밤이 되었으면,
차라리 날을 저주하는 자가 있어서 그 밤을 저주하기를 바랍니다. 특히 10절 말씀을 보세요.
"어머니의 태가 열리지 않아, 내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이 고난을 겪지 않아야 하는 건데!"
너무나 극심한 고난과 재앙을 겪게 될 때 흔히 하는 탄식입니다. 욥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울부짖는 것입니다.
3. 왜 태어나 죽지 않았던가?(3: 11-19)
11-12절에서 욥은 자신이 모태에서 죽지 못한 것을 원망하며 어머니가 자신을 품에 안고 젖을 물린 것도 탄식합니다.
현재 너무나 극심한 고난을 겪게 될 때 왜 어머니가 나를 낳아서 품에 안고 젖을 물리셔서
나를 키웠을까 원망하듯이 욥 역시 이렇게 탄식합니다. 이제 13-16절을 보세요. 만일 그 때 자신이 깨끗이 죽었더라면
세상 임금들과 고관대작들과 무덤에 들어가 안식을 누렸을 텐데 하며 탄식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이 땅에서 어떤 권세를 누렸든지 간에 다 똑같이 땅 한 평에 들어가 안식하듯이
자기 역시 그렇게 되었더라면 이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원망입니다.
그 다음에 17-19절을 보세요. 죽음의 세계, 즉 무덤에는 악한 자들이 소란을 그치고,
지친 사람들도 평강을 얻고, 노예를 함부로 부리는 감독관들의 호통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낮은 자와 높은 자의 구별이 없으며, 노예가 주인으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욥이 얼마나 죽음의 세계를 갈망하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절대평등과 절대안식이 있는 곳,
죽음의 세계로 차라리 도피하고 싶어하는 욥의 마음이 절절이 배여 있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과 생명도 주시는 하나님(3: 20-26)
욥기 3장 말씀을 분석해 보면 욥은 시간상 가장 먼 과거에서 점차 가까운 현재로 이동하면서 탄식합니다.
자신의 출생, 자신이 잉태되던 날 밤에서 시작하여 출생 이후의 성장 과정에 대해 언급한 후
마지막으로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20-23절 말씀을 보면 욥은 이제 평등과 안식과 평화의 영역으로 상징되는 죽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고난과 슬픔이 가득찬 현실 세계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욥은 자신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사람임을 탄식합니다.
그리하여 20절에서 "하나님은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하면서
고난의 현실을 탄식합니다. 자신이 아무리 죽고 싶어도 죽는 것 역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부조리한 현실을 개탄합니다.
23절 말씀이 아주 중요합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길 잃은 사람을 붙잡아 놓으시고, 사방으로 그 길을 막으시는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사방 길이 막혀 아득한 사람에게 왜 빛과 생명도 주시는가 하고 탄식합니다.
차라리 길 잃어 아득한 사람을 그냥 죽게 만들지 않으시고 이렇게 살리셔서 빛과 생명을 주시는 이유는 또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길 잃어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을 붙잡아 주시면서도 출구를 열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방으로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욥은 자신이 하나님에 의하여 완전히 포위되어 사방으로 둘러 쌓여있기 때문에 그 어떤 탈출구도 없다는
절망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방에 벽으로 막혀 있는데 뒤에서 총을 쏘는 형국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24-25절 말씀을 보세요. 밥을 앞에 놓고서도 나오는 것은 탄식소리 뿐이요 신음소리 그칠 날이 없다는 것을 괴로워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그토록 괴로워하던 일이 마침내 자기에게 닥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26절이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다같이 읽어봅시다. "내게는 평화도 없고, 안정도 없고, 안식마저 사라지고, 두려움만 끝없이 밀려온다!"
욥의 기막힌 현실을 이보다 더 잘 압축해주는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욥이 묘사한 죽음의 세계와 욥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 세계는 정반대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차라리 죽었더라면 평화도 안정도 안식도 다 누릴 수 있을 텐데 욥의 현실은 그 정반대가 되어서 고난과 두려움과 불안만 있다는 것이지요.
5.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을 당한 사람에게 "울지 마세요!" "고정하세요!"라고 위로하는 것은 좋은 위로법이 아닙니다.
울고 싶을 때에는 마음껏 울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더 좋습니다. 감정을 절제해서 마음 깊은 곳에 꼭꼭 가두어두는 것은
치유와 회복을 위해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도 슬퍼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슬픔, 계속되는 슬픔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슬픔이 장기간 계속되어 우울증까지 가져온다면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감정의 적나라하고도 솔직한 표현인 탄식과 슬픔은 때로 우리의 상한 심령을 정화(CATHARSIS)시키는 활력소가 됩니다.
욥이 자신의 고난을 한탄하면서 "차라리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하고 울부짖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세계를 동경하면서 현실을 부정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을수록 새벽도 가깝습니다.
여러분은 다 기막힌 고통의 밤을 지새운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기억에 남는 기나긴 고통의 밤들이 있었습니다.
다섯 살 때인가 동짓날 팥죽을 쑤던 부엌에 들어갔다가 누나의 엉덩이에 받혀 오른손으로 팥죽 끓이던 솥단지를 짚었습니다.
그 옛날 변변한 병원도 제대로 없던 시절에 그 날 밤 제가 겪은 고난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제 오른 손목에는 화상으로 인해 생긴 제법 큰 흉터가 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저희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팥죽을 입에 대지 않으셨습니다. 여섯 살 때인가는 동전을 삼켜서 집안이 발칵 뒤집힌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고구마를 많이 먹어서 동전 문제는 잘 해결된 적이 있습니다(이 때 저는 변비에 제일 좋은 약이 고구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라서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목 생활할 때 상한 생굴을 잘못 먹어 위경련이 일어나 죽다 살아난 적이 있습니다.
거듭되는 구토에다가 설사, 위가 마비가 되는 아픔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지금도 그 독하디 독했던 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신새벽이 밝아오기 까지 그 날 밤은 너무도 길고 길었습니다.
미국에서 개척교회를 하다가는 신장 결석증이 생겨서 또 한 차례 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새벽 기도 끝나고 집에 돌아오다가 차안에서 떼굴떼굴 구르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들이 해산하는 아픔 그 이상이라고 하니 겪어 본 사람만이 압니다. 급히 병원에 실려가 수술을 받았는데
그 날 밤 병원에서의 밤도 길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육신의 고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금방 아물었는데 마음의 상처는 꽤 오래 갔습니다.
1990년에 미국에 유학갈 때 어머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더니만 그 이듬해에 아버님 마저 돌아가셨습니다.
한 해 사이에 연이어 부모님을 여읜 아픔은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야 아물었습니다
. 오랫동안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불효에 대한 자책감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그 기나긴 고난의 밤은 어김없이 신새벽이 밀려올 때마다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깝습니다.
고통스러운 밤은 반드시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고통을 겪을 때마다 예전에 겪었던 고통이 다 지나갔다는 진실을 생각할 때 위로가 됩니다.
어떤 고난도 결국 지나가고 내가 승리할 것이다! 이것은 4: 3으로 드라마틱하게 역전승을 거둔 축구시합을 녹화로 다시 보는 것과 같습니다.
3: 0으로 지고 있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4: 3으로 이겼다는 결과를 알고 보는 경기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지금 재산과 자식들을 다 잃고 자기 자신도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울부짖고 있지만
그 잠 못 이루는 회한의 밤도 어김없이 환희와 치유와 회복의 새벽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욥의 고난과 울부짖음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결국 승리했음을 알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사화복과 우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으로 믿으신다면
고난의 밤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새벽이 찾아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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