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

욥기 강해설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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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1 16:07 조회8,5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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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첫 번째 공박: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욥 4: 1-5: 27>

 

 

 

욥기의 본론은 3장부터 시작됩니다. 욥이 하나님께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독백으로부터 시작하여 연이어 욥의 세 친구들과의 논쟁이 나옵니다.

 

특히 욥기의 몸통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4장부터 42: 6절까지는 욥과 세 친구들이 벌이는 설전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욥과 친구들이 나눈 논쟁은 욥기 전체, 즉 42장 가운데 35개의 장에 걸쳐서 나타나는데 이것은 장수로만 따져서도 83%에 해당되는 분량입니다.

 

 이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고 격려한다는 명목으로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지만 언제나 철학자요 신학자, 즉 지혜의 교사로서 자처하며 그렇게 합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처음에는 순수한 의도로 위로자의 역할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들이 전수 받은

 전통적인 지혜와 인생 경험 등을 통해 욥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교사로 둔갑하게 됩니다.

 

 

 

 이제 앞으로 여러분들이 욥이 세 친구들, 즉 엘리바스, 빌닷, 소발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읽게 될 때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언

뜻 보기에 이들이 욥보다 훨씬 더 지혜롭고 모범적인 신앙인처럼 보일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탄식하는 욥을 설득해서 혹시라도 하나님 앞에 몰래 범한 죄가 있으면 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게 하려고 갖은 이론을 구사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들이 예로부터 전수받은 지혜 전통에 충실합니다.

 

 

그 지혜 전통이라는 것이 인과응보(因果應報), 즉 인간이 현재 당하는 고통은 어디까지나 과거에 지은 죄악의 결과라는 입장입니다.

 

그리하여 욥이 이와 같이 참담한 고난을 당하는 것은 절대로 까닭 없이 생긴 일이 아니고,

다 욥이 지은 죄의 결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들은 언제나 욥을 심문하고 정죄하는 선생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욥에게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신학적인 해석이나 윤리적인 정죄가 아니라 참된 위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욥과 세 친구들이 벌이는 설전은 '실존적인 고난의 현실' 대(對) '고난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의 대결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

 

 이제 우리는 욥과 세 친구들이 나눈 설전을 통하여 중요한 진리 하나를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약 3: 1절은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남을 가르치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참혹한 고통을 겪는 친구를 그냥 찾아와 위로만 해주면 되는데 자기의 지혜와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하여

그 고통을 해석하고 정죄하려고 합니다. "염장을 지른다, 허파를 뒤집는다."는 말도 있듯이

 이와 같이 선생의 입장이 되어 해석하고 설교하고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마치 장작불에 기름을 붓듯이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

더 큰 고통을 가중시킬 수 있습니다.

 

 

경미한 고통을 당한 사람에게는 혹 이해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피 흘리는 개구리에게

 다시 돌멩이를 던지는 행위와 마찬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친구가 있을 때 가장 좋은 위로법은 함께 있어주는 것이며

정직한 침묵으로 슬픔에 동참하는 것뿐입니다. 어설픈 논리로 더 큰 슬픔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세 친구들 중에 제일 먼저 엘리바스가 욥에게 던진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과 더불어 세 차례씩이나 뜨거운 설전을 벌이게 됩니다. 엘리바스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세 친구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요 지도자급에 있었던 사람 같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엘리바스가 욥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인과응보의 도덕적 질서를 가지고 욥의 고난을 해석하다(4: 1-11)

 

 

 

 먼저 4: 1-11절 말씀을 보면, 엘리바스는 인과율을 가지고 욥의 고난을 해석합니다.

 모든 결과는 다 원인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인데 욥이 이와 같이 고난받는 것도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고

 고난받을만한 원인이 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6-8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네 믿음이고, 온전한 길을 걷는 것이 네 희망이 아니냐?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 내가 본 대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

 

 

 


 

 

 여기 보세요. 엘리바스가 욥의 고난을 해석하는 첫 번째 입장은 고전적인 지혜 그대로입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추수의 법칙이지요.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예,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예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경험한 진리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반드시 그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자연 세계는 물론이고 인간의 도덕 생활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법칙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뿌리는가에 따라서 그 열매가 결정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100% 필연적으로 옳은 것만은 아닙니다.

 

 

선을 뿌렸는데 악의 열매를 거둘 수도 있고, 신앙과 경건의 씨앗을 뿌렸는데 고난과 재앙의 열매를 거둘 수도 있습니다.

 욥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이지요. 욥은 동방의 의인으로서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반듯한 사람이었지만

순전히 사탄의 시기와 참소로 어이없는 재앙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가 내건 인과응보의 법칙,

혹은 추수의 법칙을 욥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에는 자기의 잘못 때문에 생기는 고난이 있는가 하면, 자기의 고난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신비한 고난도 있습니다. 9-11 테러 사건이 일어날 때 거의 대부분은 무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백주 대낮에 죽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보편적인 진리를 내걸 때 왜 하필이면

그들이 지목되었는가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우리는 누구든지 다 그런 고난을 당해야지

그 사람들만 선택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죄의 결과로 고난을 당한다는 일반적인 법칙을 모든 사람의 경우에 적용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경우 엘리바스의 논리는 욥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욥을 더욱 큰 실의로 내모는 비수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2. 자신의 영적 경험에 입각해 욥을 정죄하다(4: 12-5: 7)

 

 

 4: 12-5: 7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엘리바스는 자신의 신비한 체험을 언급합니다. 한번은 조용한 가운데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온 몸의 뼈마디가 흔들렸으며 온 몸의 털이 주뼛주뼛 섰는데 이런 소리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17-21절 말씀을 보세요. 그 때 들은 음성은 분명히 엘리바스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것처럼 보이는데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없으며 사람이 창조주보다 깨끗할 수 없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여기서 엘리바스는 욥이 의롭다고 변론하는 것에 대해서 아예 쐐기를 박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롭지 감히 네가 어떻게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엘리바스의 이 같은 발언에는 두 가지 중대한 교만이 숨겨져 있습니다.

 

 

 첫째로, 엘리바스는 이 메시지를 신비한 영적 체험을 통하여 들은 말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누구든지 믿음이 깊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비한 음성을

들을 수 있기에 엘리바스의 체험이 가짜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받은 신비 체험을 덕을 세우고 이웃을 격려하는데 써야지 이웃의 꼭대기 위에 서서 심판하고 정죄하는 데 쓴다면

그것은 그 출처를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엘리바스가 들었다는 신비한 음성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탄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신비 체험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세울 수 있는 것인지

그 열매를 주의해서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탄 마귀도 우리에게 가지가지 신비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의로울 수 없고, 사람이 창조주보다 더 깨끗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이지만 욥의 경우에는

적절치 않은 말입니다. 물론 욥도 피조물이기에 창조주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없으며 죄인에 불과하겠지만

욥의 태생적인 연약함, 본래적 죄성 때문에 이와 같은 불행이 찾아온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죄와 자범죄가 있듯이 원죄는 모든 인류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죄악이며 자범죄는 개개인이 특수하게 저지른 죄악의 결과입니다.

 

지금 욥이 당하는 고난은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롭지 못하다는 인류의 보편적 죄악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욥이 개별적으로 저지른 자범죄의 결과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단지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롭지 못하다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욥이 고난을 겪고 있다면

엘리바스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욥과 동일한 고난을 당해야 옳습니다.

 


 

 

 결국 엘리바스는 욥을 가르치는 선생의 입장에 서서 어떤 일반 원리를 가지고

욥의 고난을 해석하려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3. 도덕률을 따라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교수법'(divine pedagogy)(5: 8-27)

 

 

 

 이제 5: 8-27절 말씀을 보면, 엘리바스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도덕률이 한 치도 오차가 없다는 사실을 되뇌며

인간이 고난받는 것은 다 자기 잘못 때문에 생기는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쪽으로 몰고 갑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착한 사람은 반드시 상을 주시고 악한 사람은 반드시 징벌하시는 상벌관계에 철저하신 분이라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17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너무나 쉽게 욥을 정죄하는 모습이 역력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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