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강해(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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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09:53 조회6,01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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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강해 (12)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서 2: 14―26>
본문은 야고보서의 핵심을 그대로 요약해 놓은 말씀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나 사랑의 정신과 일치하지 않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며 죽은 것입니다.
바울은 갈 2: 16절에서 말씀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어쩌면 본문 말씀은 이와 같은 바울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먼저 가난한 형제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 뒤 믿음을 행함으로 입증한 두 사람의 예를 듭니다.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경우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이익이 없으며 자기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입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만 의롭다 인정받을 수 없고 믿음과 행함이 종합될 때 의로워집니다.
중요한 것은 야고보의 이와 같은 주장이 언제나 믿음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는 오직 믿음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비판하지, 믿음이 구원과 의인에 결정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본문 14절은 행함이 없으면 아무 이익이 없고 행함이 뒷받침되지 않은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한 17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So faith by itself, if it has no works, is dead."――고 선언합니다. 또한 20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faith without works is barren"――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리고 26절에서 다시 한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Just as the body without the spirit is dead, so faith without works is also dead."――고 쐐기를 박습니다.
이 모든 구절들은 믿음이 구체적인 실천 행위로 표현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행함 없는 믿음의 무익성을 말할 때, 먼저 15-16절에서 가난한 사람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어떤 형제 자매가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헐벗고 있을 때,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등등, 말만하고 그 몸에 쓸 것은 전혀 주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이율배반적이며 표리부동한 짓입니다.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따로 떨어져 노는 사람이며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본문 18-19절은 야고보서에서는 물론이고 신약 성경 전체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먼저 18절을 봅시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도대체 이 말씀을 한 화자(interlocutor)가 누군지 분명치 않습니다. 야고보의 친구인지 적인지 명확치가 않습니다. 한 가지 해결책은 믿음만 강조하는 사람을 논박하는 사람을 상상적으로 가정해 놓고 그의 상상적인 반박을 통하여 야고보 자신의 주장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 야고보서의 서신적인 성격은 'diatribe,' 즉 '통렬한 비판서'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이 해석 방법이 설득력을 가집니다. 결국 믿음만 있고 행함이 없는 상대방을 향하여 반문함으로서 행함과 믿음을 모두 갖춘 자신이 훨씬 더 낫다는 사실을 강변합니다.
그 다음 19절에서 야고보서 기자는 또 한 사람의 상상적 화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한 분이신 것을 알지만 행함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조롱합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알고 두려워 떠는 것은 귀신들도 그렇게 함으로 별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일신 하나님을 신앙고백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 야고보서 기자는 믿음을 행함으로 증거한 두 사람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먼저 21-24절에서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행위를 부각시키면서 그가 행함으로서 의롭다하심을 인정받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창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갔다는 사실을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야고보서 기자는 25절에서 기생 라합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유대인이라면 기생 라합은 여리고 사람으로서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들을 보호해 준 여인입니다(수 6: 17, 23). 수많은 믿음의 사람이 있지만 굳이 라합의 경우를 예로 든 것은 이방인 가운데에서도 믿음과 행함이 함께 역사하여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 중에 한 명, 이방인 중에 한 명씩 뽑아서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로 보여집니다. 또한 남자인 아브라함과 여자인 라합을 함께 언급함으로서 성적인 배려도 고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약 2: 15 참조). 어쨌거나 라합의 경우에도 자신의 속에 있는 믿음을 '정탐꾼들의 보호'라는 실제적인 행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보여준 여성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은 모두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듣기만 하고 행치 않는 어리석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의 가치기준을 따라 산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치기준을 따라 산 믿음과 행함의 사람들입니다.
결론: 본문 26절을 주목해보세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여기서 야고보서 기자는 영혼을 행함에, 몸을 믿음에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과 행함이 몸과 믿음을 계속해서 살아있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할 때 믿음은 영혼 안에 살아있고, 행함은 육체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믿음을 영혼으로 행함을 몸에 연결시켜야 할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영혼이 몸보다 중요하듯이 행함이 믿음보다 중요하다는 야고보서 기자의 확신에서 나온 고의적인 연결 방법입니다.
신 7: 12-14절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케 하시리니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우승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여러분, 진정으로 의로워지고 축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마음 속에 믿는 것을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십시오. 믿음만으로는 온전치 못합니다. 행함이 반드시 보충되어야만 합니다. 행함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최고입니다! 아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서 2: 14―26>
본문은 야고보서의 핵심을 그대로 요약해 놓은 말씀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나 사랑의 정신과 일치하지 않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며 죽은 것입니다.
바울은 갈 2: 16절에서 말씀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어쩌면 본문 말씀은 이와 같은 바울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먼저 가난한 형제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 뒤 믿음을 행함으로 입증한 두 사람의 예를 듭니다.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경우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이익이 없으며 자기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입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만 의롭다 인정받을 수 없고 믿음과 행함이 종합될 때 의로워집니다.
중요한 것은 야고보의 이와 같은 주장이 언제나 믿음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는 오직 믿음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비판하지, 믿음이 구원과 의인에 결정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본문 14절은 행함이 없으면 아무 이익이 없고 행함이 뒷받침되지 않은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한 17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So faith by itself, if it has no works, is dead."――고 선언합니다. 또한 20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faith without works is barren"――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리고 26절에서 다시 한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Just as the body without the spirit is dead, so faith without works is also dead."――고 쐐기를 박습니다.
이 모든 구절들은 믿음이 구체적인 실천 행위로 표현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행함 없는 믿음의 무익성을 말할 때, 먼저 15-16절에서 가난한 사람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어떤 형제 자매가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헐벗고 있을 때,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등등, 말만하고 그 몸에 쓸 것은 전혀 주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이율배반적이며 표리부동한 짓입니다.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따로 떨어져 노는 사람이며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본문 18-19절은 야고보서에서는 물론이고 신약 성경 전체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먼저 18절을 봅시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도대체 이 말씀을 한 화자(interlocutor)가 누군지 분명치 않습니다. 야고보의 친구인지 적인지 명확치가 않습니다. 한 가지 해결책은 믿음만 강조하는 사람을 논박하는 사람을 상상적으로 가정해 놓고 그의 상상적인 반박을 통하여 야고보 자신의 주장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 야고보서의 서신적인 성격은 'diatribe,' 즉 '통렬한 비판서'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이 해석 방법이 설득력을 가집니다. 결국 믿음만 있고 행함이 없는 상대방을 향하여 반문함으로서 행함과 믿음을 모두 갖춘 자신이 훨씬 더 낫다는 사실을 강변합니다.
그 다음 19절에서 야고보서 기자는 또 한 사람의 상상적 화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한 분이신 것을 알지만 행함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조롱합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알고 두려워 떠는 것은 귀신들도 그렇게 함으로 별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일신 하나님을 신앙고백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 야고보서 기자는 믿음을 행함으로 증거한 두 사람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먼저 21-24절에서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행위를 부각시키면서 그가 행함으로서 의롭다하심을 인정받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창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갔다는 사실을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야고보서 기자는 25절에서 기생 라합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유대인이라면 기생 라합은 여리고 사람으로서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들을 보호해 준 여인입니다(수 6: 17, 23). 수많은 믿음의 사람이 있지만 굳이 라합의 경우를 예로 든 것은 이방인 가운데에서도 믿음과 행함이 함께 역사하여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 중에 한 명, 이방인 중에 한 명씩 뽑아서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로 보여집니다. 또한 남자인 아브라함과 여자인 라합을 함께 언급함으로서 성적인 배려도 고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약 2: 15 참조). 어쨌거나 라합의 경우에도 자신의 속에 있는 믿음을 '정탐꾼들의 보호'라는 실제적인 행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보여준 여성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은 모두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듣기만 하고 행치 않는 어리석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의 가치기준을 따라 산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치기준을 따라 산 믿음과 행함의 사람들입니다.
결론: 본문 26절을 주목해보세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여기서 야고보서 기자는 영혼을 행함에, 몸을 믿음에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과 행함이 몸과 믿음을 계속해서 살아있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할 때 믿음은 영혼 안에 살아있고, 행함은 육체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믿음을 영혼으로 행함을 몸에 연결시켜야 할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영혼이 몸보다 중요하듯이 행함이 믿음보다 중요하다는 야고보서 기자의 확신에서 나온 고의적인 연결 방법입니다.
신 7: 12-14절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케 하시리니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우승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여러분, 진정으로 의로워지고 축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마음 속에 믿는 것을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십시오. 믿음만으로는 온전치 못합니다. 행함이 반드시 보충되어야만 합니다. 행함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최고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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