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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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0:01 조회17,74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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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 1-5>
요한 복음은 다른 세 개의 공관 복음서와 다른 점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 무대가 주로 갈릴리 지역으로 나타나지만,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주변에서 주로 명절에 활동하신 것으로 나옵니다. 또한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딱 한번만 유월절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적어도 3 번 이상 유월절을 보내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 3년 이상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바로 요한복음 때문입니다. 또한 공관복음서에 자주 나타나는 '비유'가 요한복음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 대신에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8가지의 '표적들'(signs)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요한복음을 공관복음서와는 다른 '제 4의 복음서'(the Fourth Gospel)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초대교회 교부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요한복음을 '영적인 복음서'(the spiritual Gospel)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이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나 어떤 정보보다 예수님을 어떻게 영적으로, 신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요 1: 1-18은 요한복음의 서론(prologue)으로 유명합니다. 하나의 찬송시와같이 아름다운 문체로 앞으로 펼쳐질 요한복음의 모든 내용을 축약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 주목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 당시 유행하고 있었던 'LOGOS,' 즉 '말씀'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로고스 기독론 때문에 요한복음은 시작에서부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책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신학자들이 쓴 주석책들을 읽어보면 한결같이 이 서론 부분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부분을 잘 이해하면 요한복음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 1: 1-18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1-5절은 태초에 우주만물이 창조될 때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리고 6-13절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 속에 어떻게 한 줄기 빛과 생명으로 오셨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4-18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 즉 성육신(成肉身)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의 서론 중에서 첫 번째 부분에 속하는 1-5절의 내용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분석해 보기 전에 왜 요한복음 기자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 무척 어려운 추상명사 'LOGOS,' 즉 '말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아주 몇 군데, 이를테면 두로나 시돈, 데가볼리 등의 이방 지역을 잠깐 들리셨을 뿐 팔레스타인 지역을 거의 벗어난 적이 없으십니다. 이렇게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자라나셨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은 주로 유대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중대한 문제가 하나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30년 정도 지나자 기독교가 유대 지경을 넘어서 소아시아와 그리스, 로마에까지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까지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주후 60년경에 이미 10만 명 이상의 희랍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중대한 문제란 바로 예수님의 유대교적 가르침이 희랍문명권에서 자라난 사람들, 즉 이방계 기독교인들에게는 쉽게 전달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가령 희랍인들은 '메시아,' 즉 '구세주'라는 개념 자체를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심각하게 고민한 것들 중에 하나는 '예수의 메시아되심'을 희랍인들, 즉 이방계 기독교인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석하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해석학적 과제를 예민하게 느낀 사람이 에베소 지역에서 활동하던 요한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어떻게 하면 유대계 기독교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또 희랍인들과 같은 이방계 기독교인들도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예수의 그리스도되심, 즉 메시아되심을 설명할 수 있을까를 씨름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진지한 심사숙고 끝에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바로 '로고스'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로고스라는 아이디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해석해 놓은 결정체가 요 1: 1-18입니다. 유대인들과 희랍인들이 다 함께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접점(point of contact)을 바로 로고스에서 발견했던 것이지요.
<유대인들에게 말씀은 언제나 창조력과 생명력, 그리고 지혜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어로 '다바르(dabar),' 즉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생명을 만들고 살리는 놀라운 힘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어는 말을 아끼는 언어로 유명합니다. 인간의 언어로서 다 설명할 수 없는 말의 참 능력을 십분 깨달았기 때문에 어휘수가 아주 제한되어 있습니다. 가령 희랍어의 어휘수가 20만개 정도 된다고 할 때 히브리어의 어휘는 겨우 1만개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말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으로 해석합니다. 창세기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하면 이 세상이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또 창 27장에 보면 이삭이 하는 말 한마디의 축복을 차지하기 위하여 에서와 야곱이 서로 다투는 장면이 나옵니다. 말 한 마디의 축복에 한 사람의 장래 운명이 판이하게 좌우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 33: 6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고 했으며, 시 107: 20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렘 23: 29을 보세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는 놀라운 능력을 구약 성경에서 찾으라면 끝이 없습니다.
희랍어 '로고스'는 유대인들에게 '말씀'(word)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지혜'(wisdom)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히브리적 지혜는 어떤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지혜가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 얻게되는 실천적인 지혜를 말합니다. 잠 3: 18-19에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지혜를 잘 요약해 놓았습니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이 뿐 아니라 잠 8: 1-9: 2에 보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 온통 지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유대인들에게 지혜는 빛과 생명을 주는 힘이 있었으며,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속성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로고스' 개념을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로 이해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소리로 울려나는 음성(音聲)이 아니라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생명과 빛을 주어서 살리고 새롭게 하는 위대한 능력을 가진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로고스'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지혜였습니다. 어둠과 죄악을 몰아내고 빛과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 바로 지혜였던 것입니다. 이런 히브리적 '로고스' 개념을 가졌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로고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로 가르칠 때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 혹은 '지혜'로 설명할 때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희랍인들에게 로고스는 만물을 질서있고 생동감 있게 움직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원리요 원동력이었습니다.>
요한이 정말 고민했던 것은 메시아 개념이 없었던 희랍인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희랍인들의 사고 방식 가운데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말씀'이나 '지혜,' 즉 '다바르'에 꼭 상응하는 개념이 하나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로고스'였습니다.
요한이 요한복음을 에베소에서 썼다고 학자들은 보는데 바로 이 에베소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희랍 철학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였습니다. 이 사람이 주전 560년경부터 '로고스'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헤라클리투스는 온 세상 만물이 끝없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사용한 유명한 예화가 있습니다. 즉, 사람이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빠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이 강물에 빠졌다가 다시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 번째로 빠졌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빠진 강물은 첫 번째 강물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강물에 들어갔다 나온 후 강물은 계속 흘러 다른 곳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두 번째 빠질 때에는 똑같은 강물이 아닌 다른 강물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만물이 왜 이와 같이 끝없는 변화와 순환 속에 있는 것일까요? 헤라클리투스는 만물이 끝없는 유동성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 배후에서 조절하는 어떤 궁극적 원리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바로 이 원리를 헤라클리투스는 '로고스'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헤라클리투스 이후 희랍 사람들은 이 '로고스' 때문에 정의와 불의, 선과 악, 미와 추를 가릴 수 있는 이성과 분별력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으며, 또 로고스가 만물의 에너지와 생명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희랍인들이 말씀이나 지혜에 대하여 생각했던 그대로 '로고스'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랍인들에게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지혜와 꼭 같은 성질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런 로고스 개념을 파악한 요한은 희랍인들에게 예수님을 '로고스'라고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로고스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던 희랍인들이 예수님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희랍인들에게 요한은 예수님을 그냥 '로고스'라고 말하지 않고 '로고스가,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성육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만물을 움직이고 만물에 생명력과 지혜와 진리를 부여하는 로고스가 육신을 입은 예수님 속에 그대로 체현(體現), 즉 몸으로 나타났다고 본 것입니다. 희랍인들은 이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쉽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근원이요 에너지요, 진리요, 선이요, 미인 하늘의 로고스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었습니다.
'로고스' 개념 하나가 유대인들과 희랍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공통으로 이해하는 위대한 접점이 되었습니다. 말씀과 지혜에 대하여 귀가 따갑게 들어 왔던 유대인들, 진선미의 근원인 로고스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았던 희랍인들이 예수님을 기가 막히게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공통분모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봉독한 말씀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은 태초로부터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1-2절>.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말씀으로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미 태초부터 하나님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의 선재설'(the pre-existence of Christ)라고 부릅니다.
2.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습니다<3절>.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하나 둘 창조해나가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말씀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버릇과 행동을 바꾸시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들을 때 이런 창조와 변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초대교회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이단 중에 하나는 '영지주의'(gnosticism)였습니다. 이들은 물질은 악하고 영의 세계만이 선하다고 본 이원론자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100% 순수한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께서 악한 물질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것이 하나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과는 매우 다르고 열등한 신으로 보았습니다. 이 세상은 물질 세계인 까닭에 악하고, 이 악한 세상은 악하고 열등한 창조신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와 같은 영지주의자들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3절). 영지주의자들과 달리 요한은 이 세상이 선하시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며, 좋으신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이 세상 역시 좋은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타협할 수 없는 세계관이요, 창조관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이 생명은 세상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4절>.
앞으로 요한복음에서 우리가 자주 만나게 될 두 가지 기본적인 용어는 '생명'과 '빛'입니다. 먼저 요한복음은 '생명'에서 시작해서 '생명'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만 '생명'(zoe)이라는 명사가 적어도 35회 이상, 그리고 '생명을 갖다' 혹은 '산다'(zen)라는 동사가 15회 이상 나옵니다. 그러면 생명은 무엇입니까? 파괴와 저주와 죽음의 정반대가 생명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파괴가 사라지고 창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생명되신 예수님께서 임하시는 곳마다 저주가 사라지고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이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곳마다 죽음의 세력이 정복됩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 안에 영생이 주어집니다. 영생은 시간적으로 끝없이 산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누리게 될 '삶의 질'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활이 영생입니다.
그러면 빛은 무엇을 말합니까? '빛'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에 모두 21회 이상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요 8: 12과 9: 5에서 두 차례나 당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빛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당신이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곳마다 혼돈과 무질서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어둠과 죄악이 소멸됩니다. 세상의 모든 죄악이 어둠 속에서 저질러집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어두운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빛의 새벽은 점점 더 가깝습니다. 어둠이 가득찬 터널 속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빛이 환히 보이는 출구는 가까워집니다.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마다 빛의 자녀들이 되어서 이 세상에 창궐한 어둠의 세력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빛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길을 밝히 드러내고 안내해주십니다. 어두운 밤길을 항해하는 배들에게 등대는 길을 잃지 않게 도와줍니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달빛이나 전등불은 넘어지지 않고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자입니다. 빛되신 예수님은 진리를 모르고 거짓과 어둠 속에 빠져있을 때마다, 우리에게 진리를 밝히 보여주는 등대시요, 바른 길 가도록 이끌어주시는 달빛이요 전등불이십니다. 그러므로 빛되신 예수님이 없는 우리 인생은 캄캄한 밤에 알지 못하는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와 다를 바 없습니다.
4. 그런데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이 이 세상 어두움을 비추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5절>.
요한복음에 '어둠'(skotos, skotia)이란 말은 모두 7차례 나옵니다. 빛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은 온통 칠흙같은 어둠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어둠은 무지와 죄악과 죽음과 절망을 상징합니다. 모든 죄악들, 모든 부끄러운 일들이 어둠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줄기 생명의 빛이 비추어졌지만 그들은 이 빛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어둠이 좋다고 그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완전히 물리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밤이 칠흙같이 어둡다고 할지라도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은 더욱 가깝습니다. 언젠가 빛이 어둠을 완전히 몰아낼 때가 올 것입니다.
요 8: 12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또한 12: 35-36절에 말씀하십니다.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빛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 빛을 붙잡아야 합니다. 2천년 전 유대인들처럼 빛이 어둠을 비췸에도 불구하고 빛을 거부하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독일의 문학가인 괴테는 마지막 죽어가면서 "빛, 좀 더 많은 빛을!"(Light, more light!) 하면서 빛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빛, 빛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비추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붙들어야 합니다.
결어: 첫째로, 말씀이신 예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 5: 24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또한 렘 7: 23에서 말씀하십니다.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말씀이신 예수님을 들으십시오! 영생과 축복이 있습니다!
둘째로, 빛되신 예수님을 붙들고 그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 12: 46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또한 요일 1: 5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빛되신 예수 안에 살 때 안전합니다. 넘어지지 않습니다. 빛을 붙드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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