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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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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1:08 조회4,7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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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강해(34): '수군거리는 사람들'  

        <요 6: 41―51>


 <본문 배경 분석>
 본문은 여전히 예수님과 오병이어를 체험한 무리들 사이에 일어난 대화의 일부분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당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 된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셨습니다.  세상에 먹을 것만 찾아 헤매는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이 영생을 얻게 하는 양식이 됨을 역설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어떻게 저런 촌뜨기 목수의 아들이 메시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의 외모만 보고서는 예수님의 주장 자체를 무시하고 수군거렸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한 이유>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예수님의 주장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은 매우 냉소적이었습니다.  본문 42절을 보세요.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이들은 예수님의 출신 성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이 가난한 목수였다는 사실과 그 집안 내력을 소상하게 다 알고 있는데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니, 한 마디로 웃기는 소리란 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이들이 예수님을 우습게 여기고 수군거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인간적이고 외적인 가치 기준을 가지고 사물을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신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직 인간의 외모만 눈에 들어 왔습니다.  무엇보다도 나사렛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목수일을 했던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만 기억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직장을 얻기 위하여 면접 시험을 볼 때 흔히 당하는 질문은 "당신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집안 출신이면 호감을 주고 좀 별 볼일 없는 집안 출신이며 쉽게 무시하는 것이 세상 풍조입니다. 

 영국의 고고학자요 군인이며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로서 잘 알려진 T. E. Lawrence(1888-1935)는 시인이며 소설가로 유명한 Thomas Hardy(1840-1928)와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였습니다.  로렌스가 영국 공군의 이등병으로서 근무할 때 군복을 입은 채 하디와 그의 부인을 자주 방문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로렌스가 하디와 그의 부인을 방문했을 때 때마침 도체스터(Dorchester)의 여 시장이 하디 부부를 방문하고 있어서 우연히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여 시장은 누군 지 잘 알지도 못하는 졸병과 자리를 함께 했다는 사실에 굉장한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여 시장은 로렌스가 알아듣지 못하도록 하디의 부인에게 불어로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슬쩍 토로했습니다.  "내가 태어난 이래 저렇게 계급이 낮은 졸병과 한 자리에 앉아서 차를 나눈 적은 이번이 처음이랍니다."  이 말을 듣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로렌스는 공군 이등병인 자기를 업신여기는 그 여 시장에게 유창한 불어로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부인, 제가 불어를 영어로 통역을 해드릴까요?  하디 부인은 불어를 잘 모릅니다."--"I beg your pardon, Madame, but can I be of any use as an interpreter?  Mrs. Hardy knows no French."

 여러분,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놀라운 메시지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오직 예수님의 출신 성분만 들먹거리고 있습니다.  세상적이고 외적인 가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려면 우리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오직 인성적인 것만 보게 될 것입니다. 

 삼 16: 7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처럼 중심을 보고 사물을 판단할 수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②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는데 비평하기 위하여 들었습니다. 
 대화에서 상대방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상담학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상담하러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태도입니다.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상대방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만 해도 본인 스스로가 문제의 원인을 발견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듣는 것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편견과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서는 상대방의 약점을 비판하고 공격하기 위해서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서로 논쟁을 벌일 때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상대방의 잘못된 점을 발견해서 흠집을 내려고 듣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상대방에게 어떤 우월감을 지닌 채 마치 아버지가 자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은 태도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뭔가 지시를 내리고 훈계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평등한 대화가 될 수 없습니다.  가슴과 가슴을 터놓고 하는 열린 대화가 될 수 없습니다.

 무관심한 상태에서 건성으로 듣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 정도로 그냥 귀가 열려져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듣는다 하는 태도입니다.  이 역시 들어서 그 어떤 유익도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무익한 청취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또 말할 기회를 갖지 못하니 억지로 들을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처음에 영어가 잘되지 않아서 애를 먹었을 때가 바로 이 경우입니다.  같은 학급 학생들과 그룹토의를 하게 될 때 영어 잘하는 본토 학생들이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신나게 떠들어 될 때 말을 잘하지 못해서, 또 기회를 포착하지 못해서 그냥 수동적이고 억지로 들어야만 했을 때가 많았습니다.  이 경우 아무리 많은 것을 들었다고 해도 머릿속에 별로 남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엇인가 배우고 이해하기 위한 경청이 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들음이라 할 것입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삶에 크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배우겠다는 겸손한 자세로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대방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듣는다는 자세로 경청합니다.  바로 이렇게 듣는 것이 본인과 상대방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경청 방법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듣되, 비딱한 마음을 가지고서 들었습니다.  비판하기 위해서 들었습니다.  어떤 인간적인 우월감을 가지고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세상적인 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건성으로 스쳐 들었습니다.  馬耳東風식으로 들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을 이해하고 배우기 위하여 들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삶에 유익한 교훈을 얻기 위하여, 인격적인 변화를 얻기 위하여, 진지한 자세로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45절을 기억하십시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다는 자세로 주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결어>     
 본문 말씀의 결론은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인간적인 척도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예수님을 제대로 듣지 못해서 오해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46절).  또한 유대인들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지만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 예수님을 받아먹는 자마다 다 죽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48-51절).  그 결과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미 그 안에 영생을 가졌습니다(47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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