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36)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1:10 조회5,117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요 6: 60―71>
<본문 배경 분석>
지난주에 살펴 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유대 무리들을 향하여 당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을 수 있고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신다고 까지 하셨습니다. 이러한 주장이 유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킨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한 주장에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유대 무리들 사이의 대화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과 특히 12제자들과의 대화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장을 듣고 유대인들만 수군거렸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비교적 열심히 따라다녔던 제자들까지도 수군거렸습니다. 이와 같은 수군거림은 결국 제자들 가운데에도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배신할 사람이 있다는 '제자도'(discipleship)의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한 제자들>
60-61절에 보니까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면서 서로 수군거렸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란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때 구경나갔거나 자기에게 유익이 있을 때에만 예수님을 따랐던 '무리들'보다는 그래도 믿음이 좋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12제자들, 즉 사도들보다는 커미트먼트가 떨어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커미트먼트에 있어서 '무리들'과 '12 제자' 사이에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로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렵도다'라는 말은 희랍어로 'skleros'라는 말인데, '이해하기가 어렵다'(hard to understand)라는 뜻이 아니고 '받아들이기가 어렵다'(hard to accept)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주장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느 정도 예수님에 대하여 충성심이 있었던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주장에 대하여 분명히 부정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이와 같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까요?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하는 기독교적 성만찬 예식이 저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만찬 예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바로 유대 회당으로부터 축출 당한다는 사실(요 9: 22; 12: 48 참조)을 의미했기 때문에 이들은 평생 몸담아왔던 유대 공동체로부터 그렇게 급작스럽게 단절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수군거리는 제자들의 낌새를 알아차리신 주님께서 62절에 갑자기 당신의 승천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살(떡)을 먹고 피(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하늘로 승천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승천하는 것을 직접 보면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물으시면서 장차 더 놀라운 사실까지도 보게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진짜로 중요한 것은 살리는 영이지 육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먹는 것 입는 것만 위해서 산다면 참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음식을 먹을 때 미각만 탐하면서 먹는 것 그 자체에만 몰두한다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음식을 먹어서 몸을 튼튼히 해서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해야지" 하고 음식을 먹는다면 그것은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운동에 빠진 사람이 스포츠 그 자체에만 미쳐서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면 그것은 참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건강을 위해서 자기 삶의 유익을 위해서 운동을 한다면 그것은 귀한 일이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과 의미를 어디에 두는가, 이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주님은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인생은 그 목적과 의미를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서 아름다울 수도 있고 추할 수 있습니다. 이 땅위에서 육체만 탐하고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휘황찬란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그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위에서 갖은 고난을 다 겪으면서 비참하게 살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숭고한 삶의 목적을 둔 사람은 생명이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갑자기 주제를 바꾸셔서 제자들의 우정과 의리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급기야 예수님을 팔아 넘길 제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제자는 가룟 유다를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셨을 때, 66절에 보니까 제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을 떠나갔으며 다시는 주님과 함께 다니지 않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확실히 12제자만큼 믿음의 커미트먼트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실망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이 직접 뽑아 동고동락(同苦同樂)했던 12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67절을 보세요. "너희들도 가려느냐?"
너희들도 저들과 마찬가지로 내 곁을 떠날 것이냐고 물으시자 언제나 그런 것처럼 베드로가 용감하게 나섭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68-9). 학자들은 흔히 이 말씀을 '요한복음판 베드로의 고백'(the Johannine version of Peter's confession, 막 8: 27-30)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씩씩하게 신앙고백을 한 것이지요.
이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역시 흐뭇하셔서 12명의 제자들을 뽑아 세우신 것을 되새기십니다. 70절 전반부를 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다가 갑자기 70절 후반부와 71절 말씀에서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언하십니다. 어떤 제자들은 주님을 끝까지 뒤따르지만 또 어떤 제자들은 주님을 배신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세 부류의 사람들, 'THREE Ds'>
예수님께서 오신 이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요한 복음만 보더라도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기적을 행하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뒤따랐습니다(2: 23). 수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세례 받기 위하여 나왔기 때문에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에게 요주의 인물이 될 정도였습니다(4: 1-3). 사마리아 성에서도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뒤따랐습니다(4: 1, 39, 45). 또 예수님께서 각색 병자 고치시는 것을 보고 큰 무리가 주님을 따랐다고 했습니다(6: 2).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대부분 주님을 버리고 도망치던지 아니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폭도들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언제나 세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① 예수님으로부터 이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DEFECTION).
처음에 예수를 믿다가 자기 삶에 유익이 되지 않으면 헌신짝 버리듯이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실망이 되고 믿겨지지 않으면 배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은 참믿음이 아닙니다. 읻르은 예수님의 인기가 치솟았을 때에는 예수님을 환호했지만 무기력하게 십자가를 지셨을 때에는 내빼든지 폭도들과 어울려 예수님 가슴에 못을 박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고난을 지기 위하여 주님을 찾아 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유익에 부합해서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예수 믿어서 사업도 잘되고 병도 고치고 자식들도 축복 받을 때에는 언제나 "아멘!"을 연발하지만 뭔가 일이 꼬이고 예수 믿어서 손해보는 일이 생기면 쉽게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던 많은 사람들이 그 옛날 예수님 뒤를 열심히 따라다녔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② 처음에는 잘 믿다가 나중에 점점 믿음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DETERIORATION).
아마도 가룟 유다가 이런 부류에 속하는 대표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12사도, 그것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시고 선택해주셔야지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후 교회사에서 가장 권위 있는 증언이 무엇입니까? 사도 증언(apostolic witness)이 아닙니까? 3년 동안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대로 지켜봤던 12제자들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돌아가야 할 가장 권위 있는 소스요 규범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에 의해서 뽑혀서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영웅이 될 가능성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만큼 처음에는 믿음이 좋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적어도 처음에는 예수를 잘 따랐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믿음이 떨어져서 결국은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야말로 시작은 좋았는데 결과가 좋지 않은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뜨겁게 예수를 믿다가 세월이 흘러가면서 자꾸만 세상으로 마음이 돌아서서 마침내 믿음의 길을 그르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첫사랑을 마음에 끝까지 지켜내지 못하고 결국은 육욕과 세상의 길로 빠지는 사람들이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처음도 중요하지만 끝이 더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전반전의 종교가 아니라 후반전의 종교요 역전의 종교입니다. 성경은 전반전에는 실패했지만 후반전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식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육욕과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경계해야만 합니다.
어떤 화가가 「최후의 만찬」성화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델을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서 참으로 사랑스럽고 순결한 사람을 하나 만나게 되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의 모습에는 예수님과 같은 자비와 사랑이 넘쳐났습니다. 그를 모델로 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놓은 뒤 12제자들을 차례로 그려 넣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룟 유다의 모델이 문제였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탐욕스럽고 배신의 눈을 가진 사람을 찾아 헤맸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유다의 모습을 꼭 빼닮은 사나이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누가 보더라도 뻔뻔스럽고 흉측스럽고 탐욕에 일그러진 모습이었습니다. 화가는 이 남자를 모델로 해서 그림을 다 끝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의 모델 역할을 했던 남자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선생님, 몇 년 전에 선생님께서 저를 모델로 쓰셨습니다." 깜짝 놀란 화가가 그럴 리가 없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의 모델을 했던 남자가 외쳤습니다. "옛날에 선생님께서 저를 예수님의 모델로 쓰셨단 말입니다!"
사람은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서 예수님처럼 될 수도 있고, 가룟 유다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정원과 같습니다. 물을 주고 풀을 뽑고 제 때에 가꾸어주지 않으면 잡풀이 돋아나 못쓰게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잘 가꾸셔서 끝까지 예수님을 잘 섬기는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③ 끝까지 따르는 충성스러운 제자들이 있습니다(DETERMINATION).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연약한 인간성 때문에 중간에 넘어질 때도 있고 믿음이 일시적으로 식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깨닫고 다시 일어나 주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일시적으로 배신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다음에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걸기까지 예수님에 대한 우정과 신의를 지킨 사람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순교 당할 때 자기는 예수님처럼 똑바로 십자가에 못 박힐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해서 거꾸로 못 박혔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믿음입니까? 우리는 끝까지 주님의 뒤를 따르는 충성된 제자들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결어>
제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이론적인 것이나 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성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께 전적으로 순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영과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만 붙들라고 요구하십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을 끝까지 뒤따르는 신실한 종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