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42)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1:33 조회7,360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요 7: 53-8: 11>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 중에 본문 말씀처럼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없을 것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사이에다 두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적대자들, 즉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긴장감 넘치는 맞대결을 한 판 벌이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무리들이 숨죽여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본문 말씀이 전후와 문맥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후기 첨가 편집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진정성(眞正性, authenticity)의 문제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깨닫게 해준다는 사실에서 매우 중요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현장에서 간음하는 것이 어떤 죄에 해당하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간음죄를 아주 무거운 죄악으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랍비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우상숭배나 살인, 그리고 간음죄를 저지르려면 저지르기도 전에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이렇게 간음죄는 우상숭배나 살인죄와 더불어 가장 경계해야만 할 세 가지 범죄 중에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간음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어떤 형벌을 내리는 가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습니다. 먼저 레 20: 10은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기에서는 어떻게 죽여야 하는지에 대한 사형 방법에는 언급이 없습니다.
신 22: 13-30은 이에 대한 사형 방법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혼한 여자가 간음죄를 저지를 경우 꾀인 남자와 여자 모두를 성문에 끌어내서 돌로 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유대교의 율법은 간음죄를 저지른 당사자들을 투석형(投石刑)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성문법(成文法)인 미쉬나(Mishnah)는 아주 이상한 처형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교살형(絞殺刑), 즉 목을 죄어서 죽이라고 되어 있는데 구체적인 방법까지 적시하고 있습니다. 간음죄를 저지른 남자를 먼저 인분이 무릎에까지 차 오른 상태로 감금을 합니다. 그런 다음에 아주 부드러운 수건을 거친 수건 주위에 감싸 넣어서 간음한 남자의 목덜미를 삥 둘러맵니다. 부드러운 수건을 싸 넣는 이유는 목덜미에 수건 자국이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벌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벌주신다는 사실을 보이려고 한답니다. 이제 두 사람의 남자가 정반대 방향으로 서서 양쪽 수건 끝을 세차게 잡아 당겨서 결국 졸라 죽게 만듭니다. 그러나 미쉬나조차도 교살형은 어디까지나 남자에게 주어진 형벌일 뿐, 간음한 여자에게는 돌로 쳐죽이는 투석형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시대의 정통 유대교 율법으로 보면 이 여인은 투석형에 처해질 운명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적어도 유대교 율법으로 보면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는 독안에 든 쥐요, 새장 안에 갇힌 새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인을 하필이면 왜 예수님께 데리고 왔느냐가 중요합니다.
본문 6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를 시험한다니, 즉 'TEST'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아주 쉽게 말한다면 예수님을 꼼짝 못할 올무에 빠뜨리기 위하여 그렇게 했다는 말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두 가지 딜레마에 빠뜨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쳐죽이라고 할 경우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경우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스스로 가르치신 것과 행동이 모순되어서 신뢰받지 못할 분이 되고 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고 죄인들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던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죽이라고 명하시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모세의 율법대로 투석형에 처하라고 할 경우 예수님의 선교에 엄청난 타격이 올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죄인의 친구가 될래야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께서 여인을 돌로 쳐죽이라고 모세의 율법을 그대로 따르실 경우 그 당시 로마의 국법을 어기게 됩니다. 유대인들을 식민 통치하던 로마의 국법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그 어떤 사람에게도 사형선고를 내리거나 직접 사형을 실시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 역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으셨고 로마인들의 손에 의해서 십자가형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인을 용서해주라고 말씀하실 경우는 또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이 경우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모세의 율법을 어기게 될 뿐 아니라 결국 유대인들에게 간음할 것을 권장하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선뜻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기도 어렵게 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한 편으로 돌로 쳐죽이라고 말씀하실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다른 한 편으로 쉽게 용서해주라고도 말씀하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간교한 서기관들과 바래새인들이 파놓은 함정에 꼼짝없이 빠질 수밖에 없는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위기를 어떻게 피하셨습니까? 6절에 보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여자를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께 가부간의 판단을 요구했을 때 몸을 굽히셔서 손가락으로 무엇인가 땅에 쓰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행동을 왜 하셨을까요? 도대체 땅바닥에 쓰신 글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먼저 주님께서 난처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 몸을 굽혀 땅바닥에 글을 쓰신 이유는 네 가지 정도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가시가 들어 있음을 알아차린 예수님께서 잠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의 본능적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저의(底意)를 알아차리셨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깊은 생각 없이 즉답을 하셨다가는 저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고서는 지혜롭게 비켜나갈 시간이 잠시 필요하셨기 때문에 땅바닥에 글을 쓰는 시늉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성경의 어떤 사본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도 못 들으신 것처럼 하시고서는" 땅바닥에 글을 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경우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자의 죄목을 다시 한번 되풀이하도록 유도하실 요량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함으로서 얼마나 잔인한 야수성을 마음속에 숨기고 있는가를 스스로 깨닫게 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셋째로, 역사가인 존 실리 경(卿)(Sir John Seeley)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라는 책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받으셨을 때 참을 수 없는 수치심에 사로잡히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부끄러운 자괴심(自愧心) 때문에 청중들의 눈도, 여인을 고소하는 사람들의 눈도, 심지어 당사자인 여인의 눈도 제대로 쳐다보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걸어 너무나 태연하게 한 인간을 파괴시키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쳐다보시기가 민망스러웠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묘한 호기심에 들떠서 이 장면을 그저 즐기려고만 하는 청중들의 눈길 역시 외면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재수가 없어서 현장에서 들켜버린 나머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각본에 놀아나게 생겨버린 여자 역시 너무나 불쌍해서 똑바로 쳐다보실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넷째로, 예수님께서 여자를 고소하는 무리들이 저지른 죄악을 폭로하기 위하여 땅바닥에 그들의 죄를 일일이 다 적으신 것으로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글을 쓰다는 말은 희랍어로 보통 'graphein'을 씁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katagraphein'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katagraphein'은 '누군가의 죄를 지적하기 위하여 쓰는 것'으로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는 쉽게 찾아냈지만 자기들이 몰래 저지른 엄청난 죄는 감추고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죄악을 하나 하나 쓰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네 가지 해석 방법이 다 가능성이 있지만 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추측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그 자체가 그 이유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은 하지 않으시고 땅바닥에 몸을 숙이고 글을 써 내려가시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계속해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빨리 말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만이 할 수 있는 기가 막힌 대답을 주십니다. 7절을 보세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무슨 말입니까? "그래 너희가 그렇게도 이 여인을 돌로 치고 싶으냐? 좋다! 그렇다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부터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여기서 '죄 없는 자' 라는 말은 희랍어로 'anamartetos'인데 단지 행위에 있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뿐만 아니라 그 마음과 동기에 있어서도 죄를 품고 있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행위로 혹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해도 그 마음에까지 죄를 품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7: 1에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 7: 3-5에서는 자기 눈 속에는 들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면서 판단하는 사람이 있음을 꾸짖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모세의 율법을 일점 에누리도 없이 가혹하게 적용하려고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적당히 얼버무리고 합리화시키는 속성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있습니다. 특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똑같은 간음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하면 낭만이고 남이 하면 간통"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바울의 선언처럼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죄가 없으시며 거룩하십니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어떤 사람의 죄 있고 죄 없음을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비로소 양심이 따끔따끔하게 찔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9절에 보면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보다 죄가 더 많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세월의 두께가 두꺼워지면 두꺼워질수록 죄도 역시 비례해지지 않습니까?
결국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을 둘러싸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참으로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눈이 벌게 있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일격에 맞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함정을 극적으로 비켜나가셨을 뿐만 아니라 깊이 잠자고 있었던 저들의 양심까지도 깨우실 수 있었습니다.
여인과 단 둘이 남게 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세상 사람들은 이 여자를 정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이 여자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말씀은 11절 후반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무조건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말씀이 아니라 최후의 판단을 유보하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여자에게 죄를 짓지 않고 변화될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만일 이 여인이 또 다른 죄를 저지른다면 그 때는 주님께서 책망하실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은 용서받은 여인이 다시는 똑같은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바라본 입장과 예수님의 시각에는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크게 두 가지 차이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법과 권위를 행사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언제나 다른 사람을 골탕먹이고 잡으려는 삐딱한 의도에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 나고 법 났지 모세의 법부터 먼저 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법을 집행하는 경찰관이 마음 속에 삐딱한 마음을 품고서는 "어디 한번 걸려봐라 내가 그냥 두나!" 이런 악심을 품고 일할 때 그 동네는 살벌해질 것입니다. 늘 사람들이 눈치를 보면서 두려움에 떨게 될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꼭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유대교의 권위를 들먹거리는 것이 자기들처럼 의로운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싸잡아 매도하기 위한 상투적인 도구로서 사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리 모세의 율법이 중요해도 그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동기와 태도를 더욱 중요시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죄인을 보는 눈이 다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잡을 때 그 여인의 인격같은 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들은 이 여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떤 동네 출신인지 무슨 딱한 사연이 있어서 이런 일을 했는지 전혀 알지도 못했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이 여인의 인격에는 추호도 관심이 없었으며 단지 자기들의 흉계를 달성하기 위하여 기가 막히게 좋은 케이스(CASE)로만 여겼던 것입니다. 그것도 사사건건 자기들 눈밖에 나는 행동을 서슴지 않은 예수님을 잡아 족치기에 다시없는 도구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여인을 하나의 도구로 삼았던 것입니다. 결국 간음한 여인은 간음을 했다는 사실에는 죄인이었지만 재수 없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마수에 걸려든 저당물(PAWN)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이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는 사실보다는 하나의 존엄한 인권을 가진 인격체로 보셨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이 여인이 지금은 간음을 저질러서 죄인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먼저 보셨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인간 본성에 대해서 낙관론자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죄의 칼을 휘두르시는 대신에 용서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사람을 영원히 생매장하시지 않고 또 한번의 개과천선(改過遷善)할 수 있는 기회를 베푸셨습니다.
반면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오직 자기들만이 의롭다고 생각한 나머지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는 바 비관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무자비한 정죄의 칼을 휘두르려 했으며 두 번째 기회를 생각지 않은 매우 협량(狹量)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어: 요한 웨슬리와 함께 성결 운동을 벌였던 조지 휫트필드(George Whitefield)는 교수형에 처해지기 위하여 길을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유명한 말을 던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없었다면 나 역시 저 길을 가야했을 텐데."--"There, but for the grace of God, go I."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감옥에 가거나 사형 당하지 않았습니다. 마음 속에는 하루에도 수십 차례 죄를 짓고 삽니다. 아무도 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흉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정죄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다만 용서하고 사랑할 권리가 주어질 뿐입니다. 우리 모두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됩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