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설교(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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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1 15:40 조회5,849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예수님께서 참으로 사랑하셨던 가족이 있었습니다. 머리 둘 곳 없이 외로웠던(눅 9: 58) 예수님께서 친 가족처럼 아꼈던 가족들이었지요.
베다니에 살았던 나사로와 두 여동생, 마르다와 마리아였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은 여자'로 되어 있습니다.
마 26: 6-13에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셨을 때 한 여자가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은 적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이 여인과 정확하게 같은 여인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일이 마리아의 고향인 베다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에서 동일 인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얼마나 주님을 사모했던지 자기의 가장 귀한 소유를 깨뜨려 주님께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주님 역시 마리아를 깊이 사랑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본분 11절 말씀을 보면 주님은 나사로를 '우리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다정했으면 이런 표현을 썼겠습니까?
이렇게 나사로를 비롯한 삼남매는 주님과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었던 친 가족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알 수 없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만큼 위중한 병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다급한 자매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오라버니의 병든 사실을 알렸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나사로의 중병 소식을 들으신 주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말씀 중에 세 가지가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1. 주님은 나사로의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영광을 드러낼 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주님께서 이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이 말씀의 참뜻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은 항상 예수님의 영광을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결시켜 말씀합니다.
요 7: 39은 주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오시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아직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지 않았으므로 영광의 영이 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또한 요 12: 23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영광의 때는 바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입니다.
이와 같이 적어도 요한복음 하나만 놓고 볼 때 분명한 사실은 영광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항상 연관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고난과 죽음은 주님이 받으실 최고의 영광이며 영광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중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라는 말씀은 두 가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나사로는 이미 치명적인 중병에 걸려 죽을 것을 미리 아신 주님은 이 나사로를 살리심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위기(危機)는 하나의 기회가 되듯이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중대한 계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둘째로, 나사로가 앓고 있는 베다니로 가시는 것은 십자가에 한 걸음 더 다가서는 것이기에,
베다니로 가는 길은 제자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두려움의 길이 아니라 영광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나사로의 중병 소식을 들은 주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6절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나사로가 앓는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시던 그 곳에서 이틀을 더 계셨다는 것입니다.
끔찍이 사랑하는 친구라면 전갈을 받자마자 신속하게 베다니로 가셨어야 할 터인데 이틀 동안이나 그냥 더 머무르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요 11: 17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당도하셨을 때 나사로가 무덤 속에 들어간지가 벌써 나흘이나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체하신 이틀을 여기에서 나오는 나흘의 일부로 본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중병 소식을 들으셨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아셨기에 서두르지 않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인상깊게 하시기 위하여 일부러 뜸을 들이셨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당장 가서 중병을 고치는 것보다 완전히 세상을 떠난 뒤 무덤 속에 갇힌 나사로를 살리는 것이 훨씬 더 드라마틱하게 때문에
일부러 그러셨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신 첫 번째 이적(요 2: 1-11)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누구의 설득이나 상황 변화 때문에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중병 소식을 듣고서도 이틀 간을 머무르셨다는 사실은 어떤 일을 행하심에 있어서 주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의미합니다.
어쨌든지 간에 오늘 우리는 인생의 큰 위기의 순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중병이나 사업의 실패나 갖가지 아픔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위대한 전기(轉機)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주님은 낮에 다녀야지만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의 중병 소식을 듣고서도 이틀 동안 체류하셨던 주님께서 마침내 제자들을 향하여 입을 여셨습니다.
유대 지방으로 다시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봉변을 당했던 곳으로 다시 가자니 제자들이 깜짝 놀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8절 말씀을 보세요.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그 위험한 곳에 왜 또 들어가시려 합니까?" 하면서 만류했던 것입니다.
이 때 주님의 응답이 기괴합니다. 9-10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게 무슨 뜻일까요?
유대인들은 낮 시간이 12시간으로 보았습니다. 하루가 24시간이라면 낮이 꼭 절반에 해당하는 12시간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낮에는 12 시간이 있지 않느냐?"는 주님의 질문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입니다.
첫째로, 낮은 꼭 12 시간이라는 시간의 정량이 주어져 있기에 이 12 시간이 다 끝나기 전에는 낮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을 것입니다.
둘째로, 하루 낮에는 12 시간이라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셋째로, 낮에는 12 시간이 있지만, 이 시간의 정량은 꼭 12시간 밖에 없다는 제한된 시간을 강조하시는 것으로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은 미리 정해져 있는, 제한된 시간이기 때문에 아무리 늘려보려고 해도 절대로 연장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 있기는 하지만 결코 충분하지 않으며 그 시간을 놓쳐버릴 경우에 회복할 수 없는 낭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낮은 12 시간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실 때 이 세 가지 의미를 다 강조하셨을 것입니다.
하루 낮에는 12 시간이 주어져 있지만, 오직 12 시간밖에 주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12 시간이 충분한 시간이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넉넉한 시간은 아니기에 결코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자, 그렇다면 이 말씀을 하신 뒤 "사람이 낮에 걸어다니면 햇빛이 있으므로 걸려서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으므로, 걸려서 넘어진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표면적인 의미와 심층적인 의미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표면적인 의미입니다. 낮이 해가 떠서 질 때까지 12시간,
다시 해가 져서 다시 뜰 때까지의 12 시간이 밤이라고 한다면 해가 떠 있는 낮에는 햇빛이 환하기 때문에 넘어질 염려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밤이 찾아 올 경우 빛이 없기에 아무데나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밤이 찾아오면 여행은 종식이 됩니다. 낮에 할 일은 낮에 해야지 밤이 오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진실로 강조하시고자 했던 것은 이와 같은 표면적인 의미가 아니라 심층적인 의미였습니다.
여기서 빛은 주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고 낮은 주님이 활동하실 때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세상의 빛이므로 낮은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기간이고 밤은 주님이 없는 세상,
악과 사탄이 지배하는 시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심층적인 의미를 본문의 전후문맥에 비추어 해석할 경우 이렇습니다.
제자들이 얼마 전에 주님이 큰 봉변을 당하신 적이 있는 유대 지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위험하다며
만류할 때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지금 위험하다고 해서
이 일을 늦추면 어두운 밤이 와서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주님이 맡기신 일을 해야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시간이 지나가 버릴 경우 일할 수 없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결코 부족한 시간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충분히 귀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이 주어진 동안에 주님을 위하여 귀한 일을 해야지 낮 시간이 지나고 어두운 밤이 찾아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어두운 밤이 찾아오기 전에 주님께서 주신 귀한 일을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건강을 다 잃어버린 다음에 "내가 왜 좀더 가족들과 함께 더 좋은 시간을 가지지 못했을까?
내가 왜 좀더 하나님과 이웃과 교회 위해 좋은 일을 하지 못했을까?"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빛이 환하게 비추이는 동안에 귀하고 아름다운 일, 많이 하십시오. 어두운 밤이 찾아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3. 주님은 나사로가 잠들었는데 가서 깨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에 본문 11-12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비유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우러 베다니로 가시겠다는 것이지요.
제자들은 이 말씀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러면 잘 됐습니다. 나사로는 다시 낫게 될 것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13절은 예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뜻으로 말씀했는데 제자들이 오해해서
그가 잠들어 쉰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토를 달아놓았습니다.
성경은 죽음을 거의 항상 잠자는 것으로서 묘사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주님은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마 9: 24)고
말씀하십니다. 초대 교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절할 때에도 "잤다"고 표현합니다(행 7: 60).
또한 사도 바울은 예수 안에서 죽은 사람들을 '자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살전 4: 13; 고전 5: 16).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 죽은 사람들은 결코 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잠시 잠자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다시 깨게 될 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을 보면 마치 잠자듯이 평온한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죽음이 없습니다!
기독교인인들은 영면(永眠)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죽음은 잠은 잠이로되 일시적인 잠일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잠든 나사로를 깨우기 위하여 베다니로 갑니다. 15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주님이 나사로가 죽은 현장에 있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잠자는 이를 깨우듯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서
주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베다니로 가시는 길은 수치의 길이 아니라 영광의 길입니다.
죽음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입니다. 어두운 밤길이 아니라 찬란한 햇빛이 비추이는 낮길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닥치는 그 어떠한 환난이나 역경이나 위기도 주님께서 간섭하시면 영광의 길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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