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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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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1:41 조회6,3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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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강해 (48): '죄와 벌'  

         <요 9: 1-12>


 요 8장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피해서 숨으신 것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반감을 가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 했던 것입니다.  이제 요 9장은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고쳐주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 소경이 실로암 연못에서 고침 받았는데 실로암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멀지 않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서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 누구의 죄 때문인가?>
 먼저 이 소경은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복음서에서 어떤 환자가 나면서부터 고통받은 것으로 기록된 경우는 여기가 처음입니다.  물론 행 3: 2과 행 14: 8에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 두 사람이 나옵니다.  그러나 적어도 4복음서에서 나면서부터 병이 걸린 사람은 이 환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또한 이 소경은 생계가 막연했기 때문에 앉아서 구걸이나 하는 걸인이었습니다.  이 거지 소경에 대해서 제자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2절을 보세요.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여기서 고대 유대인들로부터 뿌리깊게 전승되어온 죄와 벌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것을 항상 죄에 대한 응벌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는 도대체 누구의 죄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일까요?  사실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다면 이 사람은 죄지을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자신의 죄 때문에 이와 같은 형벌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두 가지 신학적인 해석을 내 놓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로, 유대인들은 "태어나기 전에 짓는 죄"(pre-natal sin)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어머니 복중에 있을 때에 태아가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에서와 야곱이 자궁 안에서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이미 태중에서 죄의 씨앗이 잉태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둘째로, 부모의 죄 때문에 자식이 고통을 당한다고 보았습니다.  구약은 부모들이 지은 죄가 자손 삼 사대까지 미친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 20: 5을 보세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또한 출 34: 7, 민 14: 18, 시 109: 14, 사 65: 7 등을 보십시오.  조상들이 지은 죄로 인해서 자손들이 형벌을 받을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유전 인자가 대대로 자손들에게까지 내려가기 때문에 죄의 삯이 자손들에게 형벌로 대물림된다는 설은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보고서 제자들은 그 당시 만연했던 두 가지 해석을 들면서 어떤 경우가 맞는지 주님께 여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가히 혁명적인 것입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죄와 벌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180도 뒤집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3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죄와 벌로서의 고통을 연결시키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것은 자기나 조상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로 생각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영광스러운 일을 보이기 위한 하나의 기회로 해석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현재의 고통에 대해서 과거를 탓하면서 부정적인 해석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재의 고통을 미래에 하나님께서 고치실 수 있는 하나의 기회로 보면서 고통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을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죄와 벌을 보는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건너지 못할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또 다른 축복으로 바꾸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긍정적인 기회로 해석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회가 주어질 때, 즉 때가 아직 낮일 때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4절을 보세요.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낮을 주신 것은 빛이 있는 동안에 일하라는 뜻입니다.  밤을 주신 것은 어둠 속에서 편히 쉬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5절에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주님은 어두운 세상을 환히 비출 수 있는 빛이 되십니다.  빛이 있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데, 세상의 빛이 되신 예수님 계신 동안에 그 빛을 붙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빛되신 예수님과 앞이 어두운 소경, 얼마나 날카로운 대조가 됩니까.  이 소경이 빛되신 예수님을 붙들기만 하면 얼마든지 빛을 볼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僞藥 효과: 침을 진흙에 이겨 눈에 바르시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신 뒤 소경을 고치는 의식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말씀 한 마디로 간단히 고치시던 예수님께서 이 경우에는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환자의 눈에 바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발라 환자를 고치신 것은 딱 두 번 있습니다.  막 7: 33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그의 혀에다가 침을 뱉어서 고쳐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에바다의 기적이 일어난 경우이지요.  그리고 본문에 나오는 실로암 기적에서 침을 뱉으셨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의 눈에 보면 침을 뱉어서 환부에다가 바른다는 것이 위생적으로 불결해 보입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침으로 환자를 고치는 경우가 흔히 있었습니다.  특히 아주 유명한 사람의 침을 환부에 바를 경우 병이 낫는다는 믿음이 유행했습니다.

 고대 역사가인 타키투스(Tacitus)는 아주 흥미있는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Vespasian)이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했을 때 두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눈에 병이 걸린 남자 하나와 손에 병이 걸린 남자 한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그들이 믿는 신이 베스파시안 황제를 찾아가라고 명령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눈병 걸린 남자가 먼저 황제의 침으로 자기의 동공을 축축하게 적셔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또한 손병 걸린 사람은 베스파시안 황제의 발바닥으로 자기의 손을 밟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처음에 황제는 이렇게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지만 워낙 두 사람이 애걸복걸했기 때문에 들어 주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의 병이 나은 것으로 역사가 타키투스는 전하고 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침은 독사의 독을 막을 수 있는 최고의 약이 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침이 간질병을 막아준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매일 아침 금식한 후에 생긴 침으로 눈에 발라줄 경우 안염이 낫는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악성 종양이나 목의 근육 경련 역시 침으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고대 사회에서 침이 어떤 치료의 효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손을 불에 델 경우 입에다가 대고 침으로 바릅니다.  사마귀 역시 금식한 후에 생긴 침으로 없앨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침의 치료 효력에 대한 민간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던 시대에 주님께서 침을 진흙에 섞어 소경의 눈에 발라 주셨다는 것은 주님이 얼마나 좋은 의사인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소경에게 어떤 신뢰감을 주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흙과 침이 뒤범벅된 것을 눈에 발라주심으로서 환자에게 어떤 기대 심리를 심어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위약(僞藥) 효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바로 이와 같은 일을 하신 뒤 주님은 소경에게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실로암'이라는 말은 '보냄을 받았다'(SENT)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분이었듯이, 이 소경 역시 실로암 연못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둠을 거두고 빛을 증거하도록 보냄을 받으셨다면, 소경은 평생 어둠 속에 있다가 빛을 보도록 보냄을 받았던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의 병이 나았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서 실로암으로 갔는데 예수님께서 실로암 현장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이 나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예수님께서 진흙에 당신의 침을 이겨 눈에 발라주셨을 때 이미 이 사람은 자기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대와 믿음 때문에 병이 나았던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의 병이 나아서 눈이 떠졌을 때 이 사람을 사이에다가 두고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열띤 논쟁이 시작됩니다.  이 논쟁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살펴보도록 하고 결론을 맺읍시다.

 

 <결어> 
 어떤 사람이 고통받는 것을 꼭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벌로 생각하지는 맙시다.  많은 경우에 오히려 그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베토벤은 귀머거리였기 때문에 오히려 더 위대한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밀톤은 장님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실낙원을 쓸 수 있었습니다.  송명희 씨가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뇌성마비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고통을 과거 탓으로 돌려, 자신의 죄나 부모 조상의 죄 탓으로 해석하는 것도 일리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 위하여 주신 선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아름답습니다.  죄와 벌 혹은 고통의 관계, 이것을 과거로만 돌려서 부정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미래로 돌려 긍정적으로 해석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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