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 강해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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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3:22 조회6,03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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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강해 (52): '선한 목자와 삯군'
<요 10: 7-21>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기 까지 양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주인에게 고용되어서 삯만 노리는 목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은 목자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선한 목자와 삯군이 어떻게 서로 다른지 살펴봅시다.
① 대전제: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
먼저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기 위한 한 가지 대전제가 있습니다. 7절 말씀에 나오는 대로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 되시는 까닭에 누구든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 되신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스라엘에는 두 가지 종류의 양우리가 있었습니다. 먼저 공동 양우리가 있었습니다. 양들이 밤에 집으로 돌아올 때 시내 안에 있는 모든 양들을 한꺼번에 몰아넣는 곳입니다. 이러한 공공의 양우리는 대개 아주 튼튼한 문이 하나 있었는데 문지기 한 사람만이 열쇠를 가지고 있어서 마음대로 닫고 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 10: 2-3에서 말씀하신 양우리의 문과 문지기는 바로 이와 같은 집단 양우리를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날씨가 따뜻해지는 시기에 밤에 양들이 마을로 돌아오지 않을 때 언덕배기에 몰아넣는 양우리가 있었습니다. 대개 언덕 중턱에 만들어진 이와 같은 양우리는 담 하나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었을 뿐 넓게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양우리는 문이 전혀 없이 양들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자유로웠습니다.
다만 빈 공터 어느 곳엔가 열려진 구멍이 있는 곳에 목자가 드러눕습니다. 그리하여 양들은 목자의 몸을 넘지 않고서는 마음대로 나가거나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양우리에서는 목자 자신이 양문이나 다를 바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바로 이 두 번째 종류의 양우리를 염두에 두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엡 2: 18은 "이는 저로[즉,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히 10: 20은 예수님을 '새롭고 산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예수님이라는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요 10: 9은 이것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가고 들어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유대인들은 가장 안전한 삶을 아무 해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나가고 들어오는 것으로서 묘사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 두려움 없이 문밖을 자유롭게 출입하는 것을 국가가 평화로운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민 27: 17에 보면 지도자를 백성들이 문을 출입하도록 인도하는 사람으로서 묘사했습니다.
또한 신 28: 6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얻게되는 최고의 축복을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시 121: 8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출입을 영원까지 책임져주시는 분으로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나가고 들어오는 사람은 최고의 축복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면 구원을 얻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풍성한 꼴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에 비하여 예수님 이전에 온 지도자들 가운데 참 목자가 아닌 절도와 강도들이 있었습니다. 10절 말씀대로 양의 문이요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히 얻도록 하시는 대 반하여 거짓 목자들은 도적과 같아서 도적질하고 양들을 멸망시키려 합니다.
② 선한 목자와 삯군의 차이점
본문 11-15절은 선한 목자와 삯군을 날카롭게 대조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목자들이 양의 안전에 절대적인 책임을 져야만 했습니다. 만일 양들에게 어떤 문제라도 일어날 경우 목자 자신의 과실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때에만 책임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출 22: 13은 만일 양이 찢겨졌을 경우 그것을 가져다가 증거로 보여주어야지 만 배상을 면제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대로 목숨을 걸면서 양들의 안전을 지켜내려고 했습니다. 암 3: 12은 어떤 목자가 사자의 입에서 양의 두 다리와 귀 조각을 건져낸 사실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삼상 17: 34-36에 보면 다윗이 양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때로 사자나 곰과도 싸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선한 목자는 양들을 지켜내기 위하여 때로 자기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양들과 친구가 됩니다.
자기보다 양들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실하지 못한 목자는 양들보다 자기의 이익이 언제나 앞섭니다.
소명 의식보다 주인에게 고용되어서 삯을 받기 위한 목적 하나로 양을 돌봅니다.
그리하여 자기에게 이익이 없을 때나 삯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될 때에는 언제든지 양을 버릴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대로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자기의 참 양이 아닌 까닭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칩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당신의 목숨을 양을 위하여 버리시기까지 양을 깊이 사랑하시는 목자이신 것입니다.
본문 17-18절 말씀에 보면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는 목자입니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불란서의 어떤 병사가 중상을 입었습니다. 팔에 큰 상처를 입어서 절단을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미남이었고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이었기 때문에 의사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드디어 수술이 끝나서 병사가 눈을 떴을 때 의사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팔을 잃게 된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이 비통합니다."
이 때 병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면서 의사에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팔을 잃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만 저의 팔을 내 조국 불란서를 위하여 바쳤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잃어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과 영생을 위하여 다만 우리에게 바치셨을 뿐입니다.
희랍어로 '선'을 뜻하는 용어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agathos'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는 단지 어떤 것의 도덕적인 특질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말 'kalos'라는 말은 선함 속에 어떤 매력이 있어서 사랑스럽게 보이게 힘을 가진 선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실 때 그 선이 바로 'kalos'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컨대 마을에서 '좋은 의사'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지 의술이 좋다는 것만 뜻하지 않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의사를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양들의 마음 속에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심어주시는 분이십니다.
③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궁극적 통일
본문 16절을 주목해서 보세요.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양우리 안에 들지 않은 모든 비기독교인들 까지도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양우리 안에 들어가 있는 우리뿐만 아니라 양우리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까지도 우리와 하나되기를 소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동과 서가 하나될 수 있습니다. 온 인류가 사랑으로 뭉쳐질 수 있습니다. 에거톤 영(Egerton Young)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선교한 최초의 선교사였습니다. 한번은 에거톤이 사스카체완(Saskatchewan)이라는 곳에서 인디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설교가 끝났을 때 나이 많은 추장이 선교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큰 영(the great spirit)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지요?" "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이 제게는 참 신기하고도 좋게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큰 영을 아버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큰 영의 소리를 천둥번개에서, 폭풍우와 눈보라 속에서 들었으며, 대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께서 그 큰 영을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니 저희에게는 얼마나 달콤하게 들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말을 한 뒤 추장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만 다시 물었습니다. "선교사님, 당신은 큰 영이 당신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지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 당신은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러자 인디언 추장은 환한 얼굴로 웃으면서 손으로 무릎을 탁 치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형제지간이네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다 한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한 분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영적인 형제 자매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모든 장벽이 무너집니다.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습니다. 빈부귀천이 사라집니다. 흑인종, 백인종, 황인종, 인종의 차별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양우리 안에 들지 아니한 다른 모든 양들까지도 인도하시기를 원하시는 인류 전체의 목자임을 잊지 마십시오!
④ 결어: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인가?
본문 19-2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신 뒤 유대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미쳤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을 과대망상증 환자로 보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은 미친 분이 아니라 참 말만 하시는 진실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기심이 전혀 없이 인류를 구원하는 일에 당신의 생명까지 바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거기에다가 귀신들린 자가 어떻게 사람과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수억의 인류가 새 생명을 찾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귀신들린 분이 아닙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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