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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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1:11 조회5,343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요 7: 1―9>
<본문 배경 분석>
유대인들의 삼대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입니다. 본문은 초막절이 가까운 시점에 일어난 일입니다. 초막절(the Festival of Booths)은 장막절(Tabernacles) 혹은 수장절(the Festival of Ingathering)이라고도 부릅니다. 가을 추수가 끝나는 9월 말에서 10월 초--유대력으로 티스리(Tishri), 즉 7월 15일부터 시작됨--에 광야 생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8일 동안 집을 떠나 초막 생활을 하는 축제입니다(출 23: 16; 34: 22; 레 23: 33-36; 신 16: 13-15). 초막절은 추수를 마치고 감사하는 축제입니다. 그런데 유월절이나 오순절이나 초막절에 유대 남자들은 무조건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나야만 했습니다(출 23: 17; 34: 23 참조).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명령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예외 없이 지켜야만 했습니다.
왕상 8장에 보면 솔로몬 임금이 예루살렘 성전을 초막절 기간 동안 봉헌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매 7년째 초막절 기간에 하나님의 율법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읽게 했습니다(신 31: 10-11 참조). 슥 14: 16에 보면 스가랴 선지자가 초막절에 열방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여호와 하나님을 숭배할 것을 염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초막절 축제 기간은 유대 남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유대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할 초막절이 가까워져 오자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에게 유대로 올라갈 것을 자연스럽게 권유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흥미롭습니다. 3-4절을 보세요.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이 말씀으로 보건대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 지방에는 이미 상당수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곳으로 가서 그들과 합세해서 큰 일을 하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동생들의 주장은 인간적으로 이해될만합니다. 이렇게 강원도나 충청도 혹은 전라도와 같이 소외되고 낙후된 지역에 있어서는 당신을 나타낼 수 없으니 이스라엘의 서울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품고 계신 웅대한 꿈을 이루시려면 때마침 초막절도 가까워져 오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야지만 된다는 충고인 것입니다. 유명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이렇게 외진 산골짜기 벽촌에 숨어 있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동생들이 이렇게 권유한 이유가 역시 흥미롭습니다. 5절을 보세요.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육신의 형제들조차도 예수님께서 메시아인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불신앙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은 당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피하여 갈릴리 지역에 머물러 계시려고 했지만(1, 9절 참조), 동생들은 초막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가려고 했고 또 실제로 올라갔다는 사실(3, 10절 참조)에 여실히 나타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동생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는 일이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세상적인 출세를 하든지 개인적인 야망을 이루는 정도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요한 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막 3: 21에 보면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예수님을 잡으러 다녔다고 까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친척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푸념까지 하셨던 것입니다(막 6: 4). 성경에 나타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건대 분명히 예수님의 가족들조차도 예수님 생전에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믿지 않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어머니 마리아(행 1: 14)와 야고보(고전 15: 7)를 비롯한 다른 동생들(고전 9: 5)이 비로소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눈을 돌려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동생들의 권유를 분명히 물리치셨습니다. 초막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유명해지라는 동생들의 제안을 거절하셨습니다. 어떤 논리로 그렇게 하셨습니까? 6-8절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예수님께서 유대 지방, 즉 예루살렘에 지금 올라가실 수 없는 이유는 아직 당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논리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 때라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해야할 일이 산적해 있기 때문에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지실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말씀이 주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시간 계획표에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내가 모든 일정표를 정해놓고 내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시간 계획표에 따라서>
① 천하만사에 때가 있습니다.
전 3: 1-8을 보세요.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를 잘 잘 분별하고 때를 잘 맞추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때를 잘 분별하고 포착해야 합니다. 구원의 손길을 펼쳐주시고 은혜 주시고자 할 때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버스 지나간 뒤에 손을 들어야 소용없습니다. 소 잃어버린 다음에 외양간 고쳐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희랍의 여신 중에 '기회의 여신'은 앞머리는 있는데 뒷머리는 없다고 합니다. 기회가 주어질 때 잡아야지 뒤돌아 서서 떠나갈 때 잡으려고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셔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조용히 쉬셔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셔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조용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셔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셔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아이들을 안아 주실 때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자들과 함께 다니실 때도 있었지만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으실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계획표에 따라서 움직이셔야지 당신의 인간적인 뜻대로 하시면 인류구원의 대사가 크게 그르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때를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천하만사에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 그 때를 잘 분별하시고 포착하시기 바랍니다!
② '내 때'와 '하나님의 때'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땅의 때'와 '하늘의 때'를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거스틴의 회심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어린 기도를 외면하고 젊은 어거스틴은 기독교를 버리고 마니교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정원 뜰을 거닐다 "펴서 읽어라! 펴서 읽어라!"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순간적으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성경책을 펴서 읽었더니 롬 13: 11-14절의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을 읽었을 때 어거스틴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기독교로 되돌아 왔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은혜와 구원을 베푸시는 시간을 뜻합니다. 초월적인 시간이요, 수직적인 시간이요, 심리적인 시간인 것입니다. 희랍어로 보통 시간을 뜻하는 말은 '크로노스'(CHRONOS)입니다. 일상적인 시간이요, 평면적인 시간이요, 아무런 은혜나 구원의 깨달음 없이 그냥 흘러가는 소모성 시간인 셈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본문 6절에서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을 때 사용한 희랍어가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시는 수직적인 시간을 뜻하는 것이지요. 그 시간은 우리의 권한 밖에 있습니다. 아무리 갖고 싶어해도 가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이루고싶어도 이룰 수 없는 시간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수 천년의 시간이 흘러갔는데 한국의 복음화가 이루어진 것은 120년이 채 못됩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이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덧없이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수천 년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카이로스의 시간이 임했을 때 한국은 세계에 유래 없이 기독교가 급성장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수 천년 걸려서 이루어진 복음화 과정이 불과 100년 사이에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당장 얻을 수 없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음 없이 불평하거나 실망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 즉 '카이로스'가 아직 차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어떤 단체 어떤 조직에 있어서도 내 때와 하나님의 때를 잘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꾸만 은혜를 주시고 마음 문을 두드리실 때 "아멘!"하고 응답해서 카이로스를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때'를 인내와 지혜로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는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 하에 달려 있습니다. 행 1장에 보면 부활 승천하시는 예수님 앞에 제자들이 가장 궁금해했던 것은 도대체 언제 세상의 종말이 오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언제입니까?" 이 말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되는 시점이 언제가 되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가 아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행 1: 7). 세상 종말의 때는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으니 너희는 그 딴 일에 관심을 빼앗기지 말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령 받고 전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는 건방지게 하나님이 정하실 때를 계산하고 간섭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전혀 묻지도 않고 내 생각과 내 계획대로 일방적으로 시간표를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졸라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입니다. 아직 믿음이 약한 유아기의신자들에게는 이해가 되지만 성숙한 신자들이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우리는 조금 더디 일이 진행되고 조금 고통이 뒤따르단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하나님께서 승인하시게 될 시간 계획표에 따라서 겸손히 순종하며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간 계획표를 따라 사는 것은 깊은 분별력과 많은 인내심이 요구됩니다.
<결어>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시간 계획표에 따라 움직이신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유명해지시려면 야망을 이루시려면 제자들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에 때가 때인 만큼 이 초막절 기간 동안에 유대 땅으로 건너가시라고 권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 '십자가의 카이로스'는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시간 계획표에 앞서서 일을 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 모두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시간 계획표에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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