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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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1:35 조회9,01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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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43): '예수님은 세상의 빛'
<요 8: 12-8: 20>
<본문 사건이 일어난 배경>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당연히 바리새인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유대의 율법에 의하면 어떤 주장이 참이려면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만 하는데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비판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고 계시는가를 보여줍니다.
본문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연보궤 앞에서 이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20절). 예루살렘 성전 뜰 안에는 13개의 연보궤가 있었습니다. 이 연보궤들을 흔히 '나팔궤'(Trumpets)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나팔처럼 생겨서 꼭대기 쪽은 좁다랗고 밑쪽으로 내려오면서 불룩했기 때문입니다.
13개의 연보궤에는 각각 정해진 헌금을 넣어야 했습니다. 처음 두 개의 연보궤에는 모든 유대인들이 성전 유지를 위해서 바쳐야만 하는 반 세겔의 성전세를 넣는 곳입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여자들이 아이를 낳은 뒤 정결례를 드리기 위하여 비둘기 두 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을 집어넣는 곳입니다(레 12: 8 참조).
그 다음에 다섯 번째 연보궤는 제단의 장작불을 피우기 위하여 필요한 나무를 사기 위한 헌금을 드리는 곳입니다. 여섯 번째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필요한 향을 구입하기 위하여 드리는 헌금함입니다. 일곱 번째는 성전 제사 때 사용되는 금그릇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헌금을 드리는 곳입니다.
나머지 여섯 개의 연보궤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의 헌금 이외에 자유롭게 드리고 싶은 헌금을 드리는 곳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잘못을 범했을 때 용서를 빌기 위해서이든지 아니면 감사드리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이 여섯 개의 연보궤에 헌금을 넣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의 연보궤 놓여 있는 뜰은 제사 드리는 사람들로 항상 붐비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건한 사람들을 모아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기에 이 곳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명절인 초막절이었습니다(요 7: 2 참조).
초막절 첫 날에는 특히 '성전 불 밝히기'(the Illumination of the Temple)이라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 행사는 연보궤가 놓여있는 성전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뜰에는 구경꾼들이 기댈 수 있도록 만든 주랑(柱廊)들로 삥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정 중앙에 네 개의 촛불이 있었습니다. 어둠이 몰려올 때 네 개의 촛대에 먼저 불이 켜집니다. 그 후에 성전 뜰 전체에 횃불을 통하여 연달아 불을 밝히는데 이렇게 함으로서 예루살렘 도성 모두를 환하게 밝힐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불이 환하게 밝은 기운데 이스라엘 내에 자칭 타칭 가장 경건하고 가장 경건하다고 생각된 사람들이 수많은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다음날 아침 암탉이 울 때까지 밤새도록 주님 앞에 춤을 추고 시편 찬송을 불러댑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아마 주님은 이렇게 외치셨을 것입니다. "너희는 성전에 밝힌 불이 어둠을 환히 밝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 나를 따르는 자에게는 누구든지 단지 어두운 밤만 밝히는 빛이 아니라 인생길을 환히 비추이는 빛이 있다. 성전의 불이 밝고 아름다운 빛이지만 언젠가 깜박거리면서 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빛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뜻은 무엇인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뜻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빛은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진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 27: 1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 36: 9도 말씀합니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라." 사 60: 19도 말씀합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친히 하나님이 되셔서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죄와 죽음과 거짓과 불의를 몰아내시고 구원과 생명과 진리와 정의를 채우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지만 생명의 빛안에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지만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세상의 빛이요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 안에 살 수 있습니까? 12절에 보면 예수님을 따라야 된다고 했습니다. 희랍어로 '따른다'는 말은 'akolouthein'이라는 말인데 다섯 가지의 서로 긴밀하게 관련된 의미를 가집니다.
제일 먼저 부하가 상관의 명령을 따른다는 뜻을 가집니다. 군인이 상관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듯이 우리가 믿음의 총사령관이 되신 예수님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둘째로, 노예가 주인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노예는 그저 주인이 명령만 하면 무엇이든지 기꺼운 마음으로 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의 노예요 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 종처럼 순종하겠다는 뜻이지요.
셋째로, 지혜로운 사람이 주는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사람들은 전문가를 찾아가 지혜를 구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분 예수님께서 주시는 인생의 지혜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입니다.
넷째로, 자기가 사는 도시나 국가의 법에 순복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시민은 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법을 잘 지키고 따라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섯 번째로, 선생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혹은 어떤 사람이 말할 때 그 요점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을 뒤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씀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생명의 빛안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바쳐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비판에 대한 예수님의 반박>
그러면 우리의 또 다른 관심은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의 말을 믿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민 35: 30과 신 17: 6과 19: 15의 말씀을 보면 어떤 사람의 증언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의 성문법인 미쉬나는 본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규정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오직 하나님께나 적용할 수 있는 '빛' 운운한 것에 대해서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입증할 증인이 충분치 않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대응하고 계십니까?
첫째로, 14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증언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으로서 당신이 어디서부터 오셨으며 어디로 가실지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아직도 육체에 속해서 영적인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기원이나 최종 귀착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셨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분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 가지고 계실 수 있는 생명의 빛이 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16-18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 실상에 있어서 홀로 증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증인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먼저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 두 분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계시기 때문에 율법적으로 볼 때도 흠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예수님에 대하여 어떻게 증거하고 계십니까? 먼저 하나님의 증거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더라면 도무지 그렇게 말씀하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행위가 이를 증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있지 않으시다면 예수님은 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가 사람들에게 끼친 충격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예수님의 행위를 지켜본 사람들이 180도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가 어떻게 가능합니까? 분명히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인격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반박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대답은 어처구니없습니다. 19절 전반부에 보면,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하늘의 아버지가 아닌 육신의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다그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어디로부터 오셔서 어디로 가시는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눈이 떠지지 않아서 육적인 판단, 즉 자신들의 율법적인 지식과 전통의 잣대로 예수님을 판단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 단순합니다. 19절 후반에 보면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예수님에 대하여 바로 알지 못한 까닭에 예수님의 아버지인 하나님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적인 판단으로 예수님을 잡으려고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도 그름이 없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셔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생명의 빛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죄와 죽음과 거짓과 불의가 판치는 어두움 안에 더 이상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구원과 생명과 진리와 공의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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