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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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0:54 조회8,963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요 4: 43―5>
<본문 배경 및 분석>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갈릴리 지방으로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께서 예수님 시대의 고대 지도를 보면, 사마리아 바로 위 북동부 지역에 갈릴리 지방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마리아 지역 밑에 유다 지방이 있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요람인 예루살렘 성전이 바로 유다 지방에 속했고, 또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 땅 역시 유다에 들어가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고향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에 속해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 성을 떠나 갈릴리 지방으로 들어가시면서 던지신 아주 유명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말씀이란 바로 44절을 말합니다. "친히 증거 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에서 오히려 배척을 당하신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은 다른 세 공관 복음서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마 13: 5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막 6: 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눅 4: 24).
이렇게 4복음서 모두에서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배경이 조금 다릅니다. 특히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서 사이에 뚜렷한 '배경 차이'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다른 공관 복음서에서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인 갈릴리 지방 나사렛에서 배척을 당하셨을 때 하신 것으로 되어있고, 요한에서는 갈릴리 지방에서 영접을 받으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좀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요한에서는 예수님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실 때 유대 지방, 특히 예루살렘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하신 뒤 정작 당신의 진짜 고향인 갈릴리에서는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세 복음서를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고향인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직접 들어가셔서 냉대를 받으신 후 하신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먼저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은 예수님의 활동 주무대를 유다 지방으로 잡고 있습니다. 반면에 공관복음서는 갈릴리 지역을 주무대로 하고 있지요. 바로 이 때문에 요한은 비록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나셨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있고 유월절 행사를 비롯하여 모든 국가적인 명절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던 유다 지역을 예수님의 고향, 즉 주활동 무대로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신다는 사실을 보도할 때에는 다분히 유대교의 본고장인 유다와 예루살렘이 주님을 배척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 45절에 보면 갈릴리 지역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영접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영접 받은 이유가 중요합니다.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수님 하신 일을 직접 목격하고 또 체험한 뒤 믿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직접 대화를 나눠본 뒤 비로소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발견했던 것처럼, 갈릴리 사람들 역시 예루살렘에 내려가서 예수님을 직접 겪어 본 뒤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고 할지라도 자기가 직접 맛을 보지 않는 한 '화중지병'(畵中之餠)일 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고 할지라도 남의 이야기만 듣고서는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없습니다. 직접 자신이 가서 봐야 합니다. 체험해봐야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순전히 예수님을 직접 체험해 본 뒤 예수님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배척 당하신 이유>
그러면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왜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깊은 뜻은 무엇일까요?
①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너무나 잘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코흘리개 어린이 적부터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누군지, 어머니가 어떤지, 형제 자매들이 무엇을 하는지 세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선감이 없고 존경심을 갖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아버지 일을 거들어 주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황당했을 것입니다. 막 3: 21에 보면 심지어 예수님의 친척들도 예수님을 정신 이상자 취급을 했습니다. 또한 막 3: 31-35과 요 7: 5에 보면 예수님의 친가족들조차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집에 돌아오도록 채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족 친지들까지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니 보통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높이 보지 않았던 일은 극히 당연할 것입니다. 화란의 유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90)는 생전에 모두 800 여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단 1개만 팔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나이 37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고흐의 그림을 모은 전시회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겨우 있었다고 합니다. 고흐는 자기 고국인 네덜란드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배척 당했던 것입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한국 속담이 있듯이 자기 고향 땅에 별 볼일 없는 가문의 사람이 갑자기 출세라도 하는 날에는 사람들이 옛날 일만 생각하며 존경하는 마음을 별로 가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세상 인심인데 예외 없이 예수님께도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의 출신 지역을 들먹거린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 46) 그렇게 보잘 것 없고 형편없는 동네, 아직까지 아무도 위대한 사람, 유명한 사람이 나오지 못한 동네에서 무슨 대단한 것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참으로 위험한 편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습니다.
고전 1: 27-9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출신 지역을 가지고, 가문을 가지고, 외모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갈릴리 시골 마을 작고 별 볼일 없는 동네 나사렛에서 인류를 구원한 그리스도께서 나오셨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BC와 AD로 나누신 메시아 예수께서 나오셨던 것입니다.
② 예수님은 더 이상 '나사렛 동네의 초라한 목수'가 아닙니다.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대하지 않은 이유는 여전히 예수님의 초라한 과거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여기에서의 예수님의 영광과 권능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목수의 아들'이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서 엄청난 권능을 가진 분이시기 때문에 '목수의 아들'이라는 표현 대신에 '선지자'라는 용어를 쓰고 계십니다. 이사야나 에레미야나 에스겔, 엘리야, 엘리사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 반열에 당신을 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을 판단함에 있어서 과거를 보지말고 현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지난번에 국무총리 지명자 장상씨의 청문회를 보면서, 사람의 과거를 자꾸 캐내면 아무도 온전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했습니다. 장상씨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던 국회의원들 역시 과거에 저지른 비리를 파헤치면 그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을 것입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한국 속담처럼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내 자신이 온전하지 못한 것처럼 내 이웃 역시 온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너그럽게 인정하고 이웃을 관대한 마음으로 바라 봐야 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이웃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나사렛 촌동네의 목수로서 보았지만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과거의 사람이 아닙니다. 선지자요, 메시아요,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죄 많고 초라했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한 모습을 세상에 보이십시오!
③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형제 자매요 동향 사람들입니다.
막 3: 31-35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실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육신의 동생들과 누이들이 찾아 왔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누가 우리의 진정한 가족입니까? 누가 우리의 고향 사람들입니까? 단지 피가 섞였다고 해서, 이른바 삼연(三緣), 즉 혈연(血緣), 지연(地緣), 학연(學緣)을 함께 나눈다고 해서 친근감을 느낍니까? 어리석습니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나눈 형제 자매가 육신의 피붙이보다 훨씬 귀하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나사렛에서 살았던 예수님의 가족 친지들,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누가 진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까? 누가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요, 친척이요, 동향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 세상의 모든 연줄을 끊어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진정으로 한 형제 자매로서 연합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어>
중세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질투'(envy)와 '탐욕'(greed)은 7가지 치명적인 죄 중에 둘인데 어느 날 함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둘은 천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천사는 둘 중에 어느 하나에게 원하든 대로 다 줄 터인데, 그 옆에 있는 자는 두 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탐욕'이는 언제나 욕심이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질투'보다 두 배를 더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질투'에게 먼저 소원을 말해보라고 말했습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질투'가 어떤 소원을 말했는지 아십니까? 자기 눈 한쪽이 멀었으면 좋겠다고 소원했습니다. 과연 '질투'다운 소원입니다. 자기 눈 하나가 멀 경우, 탐욕이의 눈은 두 개 다 멀기 때문에 그렇게 소원했던 것이죠. 이런 것을 두고 막상막하(莫上莫下)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탐욕과 질투심 때문에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자기가 잘 아는 사람일수록 욕심과 질투 역시 비례해서 커집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은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고향 사람들에 의해서 냉대를 당하시고 외면당하신다고 하신 말씀은 뼈아픈 말씀입니다.
오늘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다른 외국 사람들은 잘 높이면서도 자기 나라 사람은 함부로 무시하고 짓밟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 풍조를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욕심과 질투심 때문에 사람의 외모를 보고, 과거를 보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마른 막대기라도 홍해를 가를 만큼 위대한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면 가장 천한 동네에서 자란 사람이 인류의 구세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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