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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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1:29 조회7,472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요 7: 37-44>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37절과 38절입니다.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生水)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 말씀을 듣고서는 무리들 가운데 예수님의 메시아성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께서 참 선지자라고 말했고(40절), 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로 보았으며(41절),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날 수 있겠느냐 하면서 의심하기도 합니다(41절). 어쨌든 간에 이와 같은 무리들의 논쟁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난다는 말씀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사건이 '명절 끝날, 곧 큰 날에'(37절)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명절은 초막절, 혹은 수장절 마지막 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수의 강'에 대한 말씀은 초막절 마지막 날 성전 제단에 물을 붓는 예식(libation)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세 가지 국가적인 명절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월절(무교절)과 칠칠절(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장막절 혹은 수장절)입니다. 이 세 절기가 되면 예루살렘에서 15 마일 반경 안에 사는 모든 유대 남자들은 반드시 축제에 참가를 해야만 했습니다.
초막절은 유대 종교력으로 디스리월, 즉 제 7월 15일에 시작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월력으로 환산할 경우 10월 15일 쯤 되는 날이었지요. 그런데 다른 두 절기와 마찬가지로 초막절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로, 역사적인 의미입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집을 떠나 작은 초막, 혹은 장막 안에서 살며 고생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절기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초막절이 되면 예루살렘 곳곳에 초막이 세워졌습니다. 평평한 지붕 위에나, 아니면 거리에, 시내 광장에, 정원에, 심지어 성전 앞마당에까지 초막을 세웁니다.
이 때 세우는 초막은 초막절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 임시로 가설하는 것일 뿐 영구용은 아니었습니다. 초막의 벽은 나무 가지나 이파리로 만들어졌으며 비나 뜨거운 열기를 가릴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태양을 완전히 가리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지붕은 풀로 엮어 만들었는데 밤에 별을 볼 수 있도록 구멍 사이사이가 어느 정도 넓게 만들어져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초막절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먼저 갖습니다. 그 옛날 자기의 조상들이 광야 사막에서 지붕도 없는 초막을 짓고 유리방황 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7 일 동안 초막 생활을 복원해서 고생을 사서했던 것입니다(레 23: 40-43).
개인이나 국가나 간에 그 옛날 고생했던 시절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기회가 주어질 때 자주 기념해서 온 몸과 마음에 새겨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똑같은 고난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설령 비슷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극복해낼 수가 있습니다.
둘째로, 농경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초막절은 철저히 추수 감사 절기였습니다. 그리하여 출 23: 16과 34: 22을 보면 '수장절'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추수한 곡식들을 저장한다는 뜻이지요. 이 때문에 초막절 혹은 수장절은 이스라엘의 모든 절기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축제 중에 축제였습니다.
한 해 동안 고생해서 얻은 곡식들을 창고에 모아들이는 것,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보리나 밀, 포도 열매를 잔뜩 모아서 차곡차곡 창고에 집어넣는 기쁨, 이것은 농사를 지어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기쁨입니다. 슥 14: 16-18을 보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면 다른 날이 아닌 초막절에 열국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 올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레 23: 40을 보면 초막절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 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이 말씀이 초막을 짓기 위한 재료들을 가지고 오라는 것으로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초막절에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 올 때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기 위하여, 즉 하나님을 찬양하는 의미로 흔들기 위하여 가지고 와야 할 재료들로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로 바리새인들의 해석을 쫓아서 이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문제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자마다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단다고 말씀하셨을 때 도대체 초막절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초막절 기간 동안 유대인 남자들은 나무 실과나 종려나무 가지 혹은 시내 버들을 가지고 와서 제단 주변을 행진했습니다.
이 때 제사장은 황금 주전자를 들고서는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물을 가득 채웁니다. 사람들이 사 12: 3, 즉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라는 노래를 부르는 동안 제사장은 수문(水門, Water Gate)을 통과해서 물이 담긴 주전자를 들고서는 성전에 다시 올라갑니다. 그리고 성전 제단 위에다가 그 물을 붓습니다. '관제'(libation)라고 해서 제단에 물이나 포도주를 붓는 예식이 고대 중동 지방에 자주 있었는데 바로 이 관제 예식을 하기 위하여 그랬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사장이 물을 붓는 동안 레위인들로 이루어진 성가대가 '할레'(Halle), 즉 '시 113-118장을 피리 반주로 힘차게 부릅니다. 성가대원들이 시 118: 1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노래와 시 118: 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노래, 그리고 마침내 마감 찬양인 시 118: 29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노래를 부를 때 예배자들은 준비해 온 종려나무 가지나 버드나무가지를 힘차게 흔들면서 환호성을 지릅니다.
이렇게 전 예배 과정이 하나님께서 주신 관제 예식을 행함으로서 즉, 물에 대하여 감사--반석에서 물이 솟아났던 그 옛날의 사건을 기억하면서--함으로서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특히 초막절 마지막 날 사람들은 여리고 성을 일곱 번 돌아서 성이 무너진 사건(수 6: 1-27)을 기념해서 제단 주변을 일곱 번 돌게 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초막절 예식의 절정에 도달했을 때 예수께서 큰소리로 외치셨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초막절의 클라이맥스인 제사장의 물 붓는 예식, 즉 관제 예식이 벌어졌을 때 바로 이 말씀을 던지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 찾아오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영원한 생수를 얻게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요 4: 14에서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리하여 생수의 근원이 되신 예수님께 나아갈 때 생수의 강이 그 마음 깊은 곳에서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 55: 1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우리가 세상일에 목이 마를 때 생수의 근원이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삶 속에 생수의 강, 즉 성령이 충만해지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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