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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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0:56 조회7,172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요 4: 46―54>
<본문 배경 및 분석>
본문은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행하신 표적(sign)에 대해서 말씀하고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 들어 가셔서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이 첫 번째 기적이라면 이것은 두 번째 일어난 기적임을 본문 54절에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본문 기적이 마 8: 5-13절과 눅 7: 1-10절에 나타난 기적과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하인을 멀리서 고치셨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현장에 직접 가지 않으시고 멀리서 병을 고치셨다는 사실과 상대방의 믿음--왕의 신하와 백부장-- 때문에 아들과 종의 병이 나았다는 사실에는 분명히 어떤 유사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기사는 그 나름대로 독립된 표적 기사로 처리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전해주는 치유 이적은 예수님과 왕의 신하 사이에 뚜렷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는 누구였을까요? KJV은 이 사람을 'nobleman,' 즉 '귀족'으로서 번역하고 있고, NRSV는 'royal officer,' 즉 '왕의 신하'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희랍어 원어 'basilikos'는 확실히 왕과 관련된 어떤 고위직을 의미하기 때문에 두 번역이 모두 설득력이 있습니다. 어쨌든 간에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그 당시 갈릴리 분봉왕(tetrarch)이었던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의 신하 중에 상당히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마 14: 1; 눅 3: 1 참조).
이렇게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목수이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목수'와 '귀족,' '목수'와 '왕족,' 신분상에 건널 수 없이 깊은 간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 하나로 그의 아들이 병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왕의 신하의 어떤 모습이 이와 같은 기적을 불러 왔을까요?
<왕의 신하가 목수 앞에 무릎을 꿇다>
① 왕의 신하는 자존심을 깨끗이 버렸습니다.
본문 46절에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에 계셨는데 왕의 신하의 아들은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나와 가버나움 간에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습니다. 약 20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당시처럼 교통이 편리하지 않았던 시대에 20마일은 상당히 먼 거리였습니다. 걸어서 여행하기에 만만치 않은 거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그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와서 예수님께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자식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부정(父情)이 먼 거리도, 또 신분 계급의 차이도 다 뛰어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틀림없이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왕의 신하가 어떻게 나사렛 목수에게 먼 길을 찾아와 도움을 청한단 말인가? 그러나 신하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예수님께 찾아 왔습니다. 자존심을 깨끗이 접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임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의 체면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의 자랑이나 지위를 포기할 줄 아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② 왕의 신하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나아간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신다는 소문 때문에 혹시 자기 아들의 병도 고쳐주시지 않을까 해서 기대를 품고 왔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신하의 아들은 중병에 걸려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께 찾아 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다 내 팽개치고 주님께 나아와 도움을 청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 신하의 사정을 들으신 다음에 주님께서 내뱉으신 말씀에 있습니다. 48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물론 왕의 신하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서 예수님 주변에 가득 몰려든 세상 사람들에게도 겨냥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왕의 신하도 마찬가지이고, 세상 사람들 역시 무슨 기적이나 이사가 일어나야지만 믿음을 가지는 세태를 꼬집으신 것입니다.
아마 이 말을 들은 신하는 속이 뜨끔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뭔가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어떤 기적이나 신비한 사건이 일어나야지만, 이 신하 역시 예수님의 신성을 믿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자기의 병든 아들을 고쳐 주신다 못하신다 아무 말씀은 않으시고 표적과 기사만 구하는 세태를 꾸짖으시는 주님의 태도에 아마 실망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아마 낙심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조금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더욱 더 의연하고 집요하게 중단 없이 주님께 도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49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님의 꾸짖는 소리에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발 가나에서 가버나움으로 내려 오셔서 죽어 가는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낙심함이 없이 주님께 전적으로 매어 달리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려면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를 하던, 전도를 하던, 무엇을 하던 낙심하지 않고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합니다. 당장에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신앙 생활은 100미터 경주나 200미터 경주처럼 단거리 경기가 아니라 마라톤 경기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매달릴 때 언젠가 축복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게 될 것입니다!
③ 왕의 신하는 전적으로 예수님을 의지했습니다.
당신의 꾸짖는 소리를 듣고 낙심할 줄 알았던 신하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당신의 도움을 구하자 예수님은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그 당시 최고위층 신분의 사람으로서 예수님께 나아 온 것도 대단한데 한 방 쏘아 부친 독설에도 굴함이 없이 예수님께 끈덕지게 매달리는 신하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강렬한 인상을 받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50절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예수님께서 자기 아들이 있는 가버나움 현장에 직접 가지도 않으신 채 "네 아들이 살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불신앙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내 아들이 죽어가고 있는 집에 가서 직접 안수 기도를 해주어도 나을까 말까인데,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는 거리가 20마일도 넘는데 어떻게 여기서 말씀하신다고 해서 멀리 있는 내 아들이 나을 수 있단 말인가?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았더라면 이 말씀에 코웃음을 쳤던지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끌고 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하는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전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의지했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자기 아들의 병이 나을 줄로 믿고 예수님 곁을 떠나 자기 고향집으로 돌아갔던 것이지요.
이렇게 돌아가던 신하의 아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51-53절을 자세히 한 번 보세요.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열심히 집으로 돌아가던 신하가 길 도중에 기쁜 소식을 전해주러 오는 자기 집 종들을 만났던 것입니다. 종들은 주인의 아들이 살았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요 신기한 일입니다.
너무나 신비한 일을 당하였기 때문에 신하는 묻습니다. 그래 우리 아들이 낫기 시작한 때가 정확하게 언제쯤 되느냐? 시간을 물어 봤더니 어제 제 7시, 즉 유대 시간으로 치면 오후 1시에 열기가 떨어지며 병이 낫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신하가 시간을 계산해 보니 자기 아들의 병이 낫기 시작한 때는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바로 그 때였습니다.
예수님이라면 말씀 한 마디로 자기 집에 직접 가지 않으시고, 자기 아들의 형편을 직접 보지 않으시고서도 얼마든지 병을 고치실 수 있다는 확신 하나로 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이 오늘도 어떤 믿음을 가지는가에 따라서 하나님은 여러분의 믿음의 크기만큼 역사하실 것입니다.
④ 왕의 신하는 물론이고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본문을 찬찬히 살펴보면 신하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확실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꼭 두 차례입니다. 먼저 50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갔다고 했습니다. 또한 53절에 자기 아들의 병이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나았다는 확신을 하게 되자 "자기와 온 집이 다 믿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믿음의 차이를 잘 분별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50절에서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분명히 귀한 것이지만 아직까지 신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할만한 믿음은 되지 못합니다. 여기에 반(反)해서 53절에서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확실하게 체험한 후에 자기와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개인적 구주로 믿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단지 병마를 치료하시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자신과 온 집안 식구들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해내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믿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결어>
우리의 믿음은 표적이나 기사를 구하는 신앙으로부터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구속론적인 신앙으로까지 확대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우리의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을 의미합니다. 왕의 신하는 목수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했습니다. 그랬을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폐결핵 환자가 봄날이나 가을날에 따스한 햇빛에 자기의 온 몸을 내어놓은 채 일광욕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환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태양 빛에 자기의 온 몸을 맡긴 채 광선을 쪼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태양 광선이 저절로 알아서 체내에 있는 결핵균을 죽여줍니다. 환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기의 온몸을 태양 광선에 맡긴 채 조용히 기다리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제일의 미덕(美德)도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에 우리의 삶 전체를 그대로 의탁하는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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