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강해(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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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09:46 조회4,48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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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 죄 = 사망
<야고보서 1: 12―15>
본문 말씀은 두 가지 주제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12절은 시험을 인내로 잘 통과한 사람이 얻게 될 축복을 말하고, 13―15절은 시험과 죄와 욕심, 그리고 사망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시험을 잘 참아 내는 자는 결국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됩니다.
성도는 밖으로는 시련과 핍박을 받게 되고, 안으로는 가지가지의 유혹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불같은 시험을 인내로 잘 넘어섬으로서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사람――즉, 신앙을 검증받은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복은 장차 도래할 천국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것입니다.
고대 희랍 사회에서 면류관은 경기에서 우승한 선수들을 기리거나, 고상한 지위나 계급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면류관'은 모두 하나님 나라에서 성도가 얻게될 보상이나 영원한 지위를 상징합니다. 특히 '생명의 면류관'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함께 사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계시록 2: 10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약속합니다. (딤후 4: 8의 '의의 면류관'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는 축복을 말하며, 벧전 5: 4의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은 하나님의 영원무궁한 영광에 참예하는 축복을 뜻합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보상들, 즉 생명과 의와 영광의 면류관들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시험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내는 아무 보장 없이 무조건적으로 감내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는 분명한 약속아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마태 24: 13에서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까지 잘 참아내는 사람이 결국 최후 승리를 얻게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13절은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시험'은 1: 2의 시험과 달리 오직 한 가지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즉, 'temptation,' 즉 내적으로 죄의 유혹을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받을 때'라는 한글 성경을 '죄의 유혹을 받을 때'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유혹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아무도 죄악으로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악과 전혀 상관없는 선,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시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믿음을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었지, 죄악으로 유혹하신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또한 신명기 8: 2과 13: 4을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셨다고 했는데 이 역시 죄악으로 내모는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3. 사람이 시험받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 욕심 때문이며,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게 됩니다.
사람이 죄의 유혹을 받는 것은 '욕심'이라는 미끼(bait)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탓할 수 없습니다. 순전히 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욕심(desire, epithymia)이 죄의 유혹으로 이끌고 갈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욕심은 항상, 대상(object)에 의해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쉽게 이끌립니다. 예쁜 여자, 술, 돈, 화려함, 인기, 권력, 등등의 감각적 대상의 올무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좋은 일을 위한 욕심, 어떤 이의 표현대로 '주를 위한 긍정적 의미의 욕심'도 있을 수 있지만, 욕심은 일반적으로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되는 부정적 감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수학 공식은 자명한 진리입니다. "1 + 1 = 2"라는 공식은 항상 옳습니다. 그래서 철학 용어로 수학이 가르치는 세계를 'tautology,' 즉 '항진(恒眞) 명제,' 항상 진리인 명제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항상 참인 명제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본문 1: 15의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이 명제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먼저 욕심(epithymia)이 잉태하여 죄(hamartia)를 낳습니다. 여기서 '잉태하여,' '낳는다'는 표현은 다분히 성적(sexual) 의미를 함축합니다. 다시 말해 욕심이 죄를 잉태하여 출산하고 죄가 커나가 사망을 낳는 여성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세상의 온갖 악한 대상들――물질, 향락, 권력, 인기, 등등――과 음란한 결합을 이룰 때 필연적으로 '죄' 덩어리라는 사생아를 낳게 됩니다.
그 다음에 악한 욕심의 외아들인 죄는 점점 자라나 마침내 절정에 이르게 되면 사망이라는 최후의 원수를 낳게 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이라는 표현과 "죄가 장성한즉"이라는 두 표현을 비교해보십시오. 욕심이나 죄가 모두 생명체의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속성은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나쁜 의미에서입니다. 욕심에 중독되어 가지가지의 죄악을 낳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의 굴레에 갇혀 점점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죄가 욕심이라는 어머니의 탯줄을 끊고 나온 뒤 자꾸만 자라나서 더 이상 성장할 여력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될 때, 결국 죽음으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결론: 첫째로, 여러분이 죄의 유혹, 즉 시험에 빠져 죄를 짓는다면 이에 대하여 하나님을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자유 의지를 가진 여러분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둘째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5: 24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욕심이야말로 일그러진 감정이며 만악의 뿌리입니다. 욕심을 경계하십시오. 모든 죄악과 죽음이 이로부터 나옵니다. 여러분이 죽음을 보지 않고 영생을 얻기 원하십니까? 욕심의 사슬을 끊어버립시오. 그러면 살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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