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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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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0:33 조회7,8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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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10): '성전을 성전 되게 하라!'  

 <요 2: 12―16>


 <배경 분석>
 갈릴리 가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 만드신 주님은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잠시 동안 머무르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최고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시점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던 거지요.  우리가 예수님의 공생애가 최소한 3년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순전히 요한복음의 기록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는 말씀이 본문 이외에 6: 4과 11: 55에서 꼭 세 번 나타납니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유월절은 1년에 한 번씩 돌아오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가 3년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단 한 차례만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사역이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이루어졌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직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는 아주 짧게 체류하셨고(2: 1-12; 4: 43-5: 1; 6: 1-7: 14), 주로 예루살렘에서 중요한 활동을 하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본문 말씀은 '성전 숙청'(the cleansing of the Temple)으로서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성전 숙청' 사건은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공관복음서 역시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21: 12-13; 막 11: 15-17; 눅 19: 45-46).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이 사건이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4복음서 기자들 모두가 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한복음의 기록과 공관복음의 기록에 있어서 한 가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성전 숙청 사건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의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일어났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시점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성전 숙청 사건 때문에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체포된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성전 숙청 사건이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요?  어떤 기록이 더 옳은 걸까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적어도 성전 숙청에 관한 한 공관복음의 기록이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요한은 왜 성전 숙청이 예수님 공생애 초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고 있을까요?  그것은 요한의 관심이 어떤 역사적 사실의 연대기적 순서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임을 증거 하는데, 즉 신학적인 문제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요한은 사실(facts)보다 진리(truth)에 관심이 더 많았던 것이지요.  따라서 요한은 성전 숙청이 도대체 언제 일어났는지, 즉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일어났는지 아니면 후기에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있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숙청하셨다는 사건 그 자체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전 숙청 사건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약속된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신학적으로 증거 한다는 사실에만 주목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숙청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최대 명절입니다.  애굽에서 자유를 찾아 나온 이스라엘 민족의 광복절이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서 15마일 반경 안에 사는 성인 유대 남자들은 누구나 다 유월절 축제에 참여해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민족들이 가졌던 평생의 소원이 일생에 한번이라도 예루살렘 유월절 축제에 가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유월절 시즌이 되면 예루살렘 전체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해에는 자그마치 2백 25만 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을 정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화가 나셔서 성전을 숙청하셨을까요? 
 ① 하나님의 성전을 장사소굴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15세 이상된 사람이면 누구나 다 성전세(Temple tax)를 내야만 했습니다.  반 세겔을 성전세로 냈는데 노동자가 이틀정도 일해야지만 벌 수 있는 임금에 해당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보통 다른 나라의 화폐도 자유롭게 통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성전세를 낼 때만은 외국 화폐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갈릴리 화폐인 세겔이나 아니면 성전 세겔로 내야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다른 외국 화폐들이 일상 생활에서 얼마든지 통용이 되었지만 적어도 성전세를 낼 때에는 오직 유대 화폐인 세겔로만 가능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불결한 외국 화폐가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종교적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유월절만 되면 성전에는 외국 화폐를 유대인 화폐인 세겔로 바꾸어주는 환전상들로 만원을 이루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돈을 바꾸어 줄 때 엄청나게 큰 액수의 이득을 챙겼다는 사실입니다.  일종의 커미션을 챙겼던 것이지요.  그것도 종교의 이름으로 이와 같은 경제적인 착취가 버젓이 자행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장사꾼들의 부당한 이윤추구에 침묵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다 쏟으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가격 흥정하는 소리가 가득 찬다면 이것은 분명히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장사치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② 하나님 앞에 드린 예배가 신령과 진정이 빠진 형식적인 제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성전에는 돈 바꾸는 환전상들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양이나 소나 비둘기 파는 장사꾼들 역시 가득 찼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물을 드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아무 제물이나 바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흠이 없고 완전한 제물만 허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당국에서는 제물만 검사하는 사람이 있어서 성전에 출입하는 모든 제물들이 흠이 있는지 없는지 조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만일 성전 밖에서 들여오는 제물이 있을 경우 십중팔구 퇴짜를 맞았습니다.  믿을 수 없고, 거룩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성전 안에서 짐승 제물을 사서 들어가야지만 합격이 되었는데 그 가격이 보통 비싼 것이 아닙니다.  일례로 비둘기 한 쌍을 성전 안에서 살 경우 밖에서 살 때보다 무려 열 다섯 배 정도나 비쌌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물의 합격 불합격을 조사하는 검사관은 검사비까지 챙겼습니다.  이래저래 성전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흥정을 거쳐서 바쳐진 제물이 향기로운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은 신령과 진정이 빠진 제물들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 1: 11-12은 말씀합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또한 호 5: 6도 말씀합니다.  "저희가 양떼와 소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저희에게서 떠나셨음이라."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언제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향기로운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예배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과 정성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③ 하나님의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이상하게도 요한복음에서는 빠져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성전 숙청 사건을 보도하면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는 표현을 꼭 덧붙이고 있습니다(마 21: 13; 막 11: 17; 눅 19: 46).  하나님 성전의 제일가는 목적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므로 그 이외의 목적은 다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목적 이외에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오는 것은 쇼를 보기 위해 극장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교수의 강의를 듣기 위해 학교에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 드리기 위하여 나오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결어<結語>
 예수님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요, 이유 있는 분노였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죄를 미워하는 분노였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죄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진노하셨던 것이지요.  어린양과 같이 양순하기만 하셨던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다 쫓아 내셨습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다 쏟으시고 상을 다 둘러 엎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이와 같은 분노에 찬 성전 숙청 사건을 주목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이 하나님의 성전답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예수님도 들어갈 수 없는 교회가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성루가 교회는 누구나 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과 찬송과 기도를 마음껏 드릴 수 있는 아름다운 교회, 살아있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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