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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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0:07 조회5,68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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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5): '하나님의 어린 양'
<요 1: 29―31>
본문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두 번째 증언의 전반부입니다. 요 1: 19-28에서 세례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첫 번째 증거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말씀에서 두 번째 증거의 전반부를, 그리고 다음 주에 봉독하게 될 32-34에서 후반부를 각각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35-36에서 세 번째 증거를 합니다. 1장에 나타난 세 가지 요한의 증거는 모두 예수님에 비해서 자기가 형편없이 낮은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예수님이 편하게 메시아 일을 잘 하실 수 있도록 길을 준비하고 터 닦는 일을 맡은 선구자에 불과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 요한의 두 번째 증거의 전반부중에서 특히 29절을 주목하여 봅시다. 요한이 예수님을 보자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여러분, 이 외침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의 모든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에는 모두 네 가지의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 2: 13에 보면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워 오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당연히 유월절을 상징하는 어린 양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빠져 나온 광복절이요 해방절입니다. 그런데 왜 이 날을 '유월절'(Passover), 즉 '넘어 가는 날'로 이름 부쳤을까요?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출 1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던 밤에 하나님께서 애굽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즉 위로 바로의 장자로부터 아래로 감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와 모든 짐승의 첫 새끼까지 모조리 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땅에서 애굽 사람들과 어울러져 살았기 때문에 누가 애굽인인지 누가 이스라엘인이지 분간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가족대로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이 오기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고 분부하셨습니다(출 12: 21-22). 그리고 그 날 밤 하나님의 사자가 애굽 사람들을 치러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때 어린 양의 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표시가 되었습니다. 이 피가 문 인방과 문 설주에 칠해져 있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린 양이 되셔서 그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제 이 보배로운 피를 믿는 자마다 그 옛날 애굽에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건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바른 자마다 심판의 날 하나님의 사자가 'PASSOVER,' 즉 그냥 넘어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5: 7에서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백성들의 죄를 씻기 위하여 성전에 바쳐진 제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 29: 38-42을 보면, 매일 아침과 매일 저녁 어린 양 두 마리를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백성들의 죄를 씻기 위한 예식이었습니다. 어린 양 두 마리를 하나님께 바치는 예식은 예루살렘 성전이 서 있는 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심지어 백성들이 전쟁중에 있어도, 아니면 사방으로 적군에 의해서 포위가 되어 있어도 이 예식은 중단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주후 70년경에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의 침략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릴 때까지 어김없이 행하여졌던 아주 중요한 예식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바로 이와 같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의 제단에 피 뿌려 바쳐진 제물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고난의 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렘 11: 19에서 자신이 '끌려서 잡히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사 53: 7에서 장차 오실 메시아가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과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두 선지자는 고난받은 종의 이미지를 통하여 자기의 백성을 친히 대속하는 메시아의 형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하여 고난을 걸머지신 어린 양이십니다. 그래서 사 53: 4-6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여러분,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과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를 살리게 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넷째로, 예수님을 죄와 죽음을 정복한 뿔달린 어린 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 시대에 마카비의 투쟁시대가 있습니다. 마카비(Maccabees)는 시리아의 안티오쿠스(Antiochus) 4세가 이스라엘을 가혹하게 탄압할 때 이를 물리치기 위해 독립운동을 벌였던 유대 애국주의자들이었습니다. 주전 167년과 142년 사이에 유다스 마카배우스(Judas Maccabaeus)와 네 명의 형제들이 시리아로부터 유대 백성들을 구원하여 해방 영웅들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전쟁 영웅, 시리아를 정복한 영웅 유다스 마카배우스를 어린 양, 특히 뿔달린 어린 양으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구약 성경에 보면 사무엘과 다윗, 솔로몬도 뿔달린 어린 양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예수님 역시 죄와 죽음을 이기신 정복자요, 구원의 영웅으로서, 즉 뿔달린 어린 양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본 견해는 요한 계시록에서 그대로 이어집니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계시록에서 예수님을 '어린 양' 칭호로 부른 것은 모두 29 차례나 된다고 합니다. 실로 '어린 양' 칭호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수많은 칭호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가장 의미가 깊습니다. 요약해서,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부른 것은 예수님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희생, 고난, 그리고 승리 때문입니다.
여러분, 창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고 할 때 이삭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여기에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침착하게 대답합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거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어린 양의 희생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구속하여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어린 양을 다 믿으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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