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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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0:40 조회5,95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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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3: 1―6>
<배경 분석>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표적들, 즉 기적들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표적들을 보고서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으로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표적을 보고서는 예수님을 믿으려고 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아주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3절에 보면 "진실로 진실로--amen, amen--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중생(重生, born again)해야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하늘의 말씀을 하시는데 반하여 니고데모는 땅의 것만 생각하고 대화를 했기 때문입니다. 아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니고데모와 예수님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마치 밤중에 상대방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밤배와도 같습니다.
<니고데모는 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왔을까요?>
① 니고데모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세상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밤에 찾아 왔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했습니다. 먼저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은 보통 사람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전체에 6천명이 채 못되는 아주 엘리트 집단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일에 남달리 열심이었으며 이스라엘에서 최고가는 사람들이라고 자타가 공언했습니다. 이와 같이 니고데모는 종교적으로 최고의 엘리트 집단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또한 유대의 국회 격인 산헤드린(Sanhedrin)의 멤버였습니다. 산헤드린은 유대인들의 대법원에 해당되는 70인 의회였습니다. 특히 산헤드린은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거짓 선지자들을 가려내는 일을 맡아서 했습니다.
또한 요 19: 39에 보면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장례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이 때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보통 부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는 상당한 재력을 갖춘 갑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이와 같이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높고 부유한 신분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낮에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예수님과 접촉한다는 사실이 사회에 노출이 되어서 자기 위치에 지장이라도 올까봐 일부러 밤에 찾아 왔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이지만 자기의 생명을 걸만큼 전적인 확신을 가진 채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낮에 떳떳하게 주님 앞에 나오지 않고 밤에 몰래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② 니고데모는 다른 사람에게 방해받지 않고 진실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밤중에 예수님께 나아 왔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율법을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밤이라고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오로지 율법에만 정신 집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루 종일 수많은 무리들에게 둘러 쌓여 심신이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니고데모는 니고데모대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에 밤이 좋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대단히 긍정적으로 보았다는 사실에서 잘 뒷받침됩니다. 특히 요 12: 42을 보면 유대 관원 중에도 니고데모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많았는데 바리새인들 때문에 출회(黜會), 즉 쫓겨 날까봐 드러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또한 요 7: 50-52을 보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적극 변호하고 있으며, 요 19: 39에서 니고데모는 결국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낸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비록 표적을 보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이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구원받을 만한 신앙의 길잡이는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표적을 보고 예수님께 찾아 나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다짜고짜 사람이 거듭나야지만 천국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신비한 기적이나 보고 일시적으로 흥분한 상태에서 예수님 따르는 것만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지요.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4절에 이렇게 반문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母胎)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말을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헬라어 원어 성경을 보면 '거듭난다'(born from above, born again)는 말이 'anothen'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anothen'이라는 말은 세 가지 다른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처음부터, 전적으로 철저하게'--'from the beginning, completely radically'--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두 번째로, 다시'--'for the second time, again--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셋째로, '위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from above, from God-- 태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와 같이 거듭난다는 것은 신생(新生)하는 것에 맞먹는 전적이고 철저한 변화나, 다시 태어나는 것, 혹은 인간의 업적이나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주어지는 초월적인 변화를 뜻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니고데모가 이 세 가지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하고 두 번째의 뜻만 포착했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니고데모는 거듭나는 일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으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인간이 거듭나고자 하는 소원, 즉 제발 좀 변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있을지라도 자기 스스로는 이 소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초월적인 은혜가 임할 때, 즉 성령의 역사 하심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5-6절에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사람이 거듭날 수 있는 것은 오직 물과 성령으로 가능한 것이며, 이것은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오직 영적인 눈을 뜬 사람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어떤 은혜와 축복이 주어질까요?>
물은 죄를 씻는 세례를 의미하고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해질 때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중생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될 때 얻을 수 있는 세 가지의 축복된 상태를 포함하게 됩니다.
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entry into the Kingdom of God--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모시는 사람들마다 그 속에 이미 이루어져 있지만(have already),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에서 아직 아닙니다(not yet).
② 영생(永生)--eternal life--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영생'과 '항생'(恒生, everlasting life)은 다릅니다. '항생'은 죽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영생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속성으로서의 질적인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시는 삶이 영생이며, 하나님께서 소유하시고 부여하시는 삶이 영생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서 하나님의 삶에 동참하는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과 살아 있는 영적 교제를 하는 사람마다 영생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자녀들--children of God--이 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세상의 육의 자녀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영의 자녀들이 됩니다. 자녀들이 아버지의 성품을 닮고 모습을 닮게 되듯이 하나님의 모습과 성품을 닮는 사람으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맺는 말>
사람은 누구나 좀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우리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가 있을 때 우리는 완전한 새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서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물세례로 만으로서는 역부족입니다.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부서지고 녹아지고 새롭게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되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영생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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