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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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0:44 조회5,55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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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3: 22―30>
<배경 분석>
그동안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보도하던 요한복음 기자는 갑자기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의 대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하여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 땅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예루살렘 안에 계시는데 예루살렘은 유대 지방에 속합니다. 그런데 다른 공관복음서와 비교할 때 아주 특이한 것은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예수님 역시 세례를 베푸셨다는 22절의 기록입니다. 또한 26절에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세례 주시는 행위를 자기 스승에게 고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24절을 참조해 볼 때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신 것은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 즉 아직 당신의 고유한 사역을 실행에 옮기시기 직전에 이루어진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세례 요한은 물이 풍부한 살렘 가까운 에논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에논은 사마리아 땅에서 남쪽으로 한 6-8 마일 정도 떨어진 곳으로 추정됩니다. 바로 이와 같이 다른 장소에서 상당한 세력을 이루어 세례를 주던 요한에게 제자들이 찾아와 예수님의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선교 사역을 먼저 시작한 선배였고 훨씬 더 많은 제자들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인데 예수님이 나타나신 후 상황이 바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가서 세례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제자수가 급격히 감소되어 가고 있던 현실에 위기감을 느낀 제자들의 보고에 세례 요한이 답변하고 있습니다.
<질투: 분쟁의 씨앗>
이 세상에 질투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것은 이미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가인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자기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한 나머지 동생을 죽였던 것입니다. 마음 속에 활활 불타는 질투야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만큼 무섭습니다. 그러므로 질투를 잘 다스리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세례 요한의 가슴에 얼마든지 질투의 불길을 지를 수 있는 정황이 펼쳐집니다. 선교 사역에 있어서 선배요 수많은 제자들을 끌어 모았던 세례 요한인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예수라는 사역자가 자기와 똑같이 세례를 베푸는데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 밑에 몰려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어떤 목사님이 그 지방에서 가장 큰 교회를 맡고 계신데 어느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오셔서 교인들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났을 뿐만 아니라 큰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조차도 그 교회로 옮겨가고 있는 형편과 유사하다 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질투를 어떻게 극복했는가?>
바로 이러한 때에 세례 요한이 보여준 의연한 태도는 오늘 우리가 질투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에 귀한 교훈을 줍니다. 어떻게요?
① 예수님께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서 믿었습니다. 27절을 보세요.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만일 새로운 선지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심지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자기 품을 떠나 예수님 밑으로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예수님께서 양을 훔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간다는 뜻이지요.
미국에 스펜스(Spence)라는 목사님이 어떤 마을에서 제법 큰 교회를 목회 했습니다. 예배석이 가득가득 찰 정도로 만족한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주일부터 교인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건너편에 있는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새로 부임해 오셔서 사람들이 그리고 몰려갔던 것입니다. 어느 주일 저녁 예배 때 스펜스 목사님 교회에 아주 적은 무리들만 모였습니다. 이 때 목사님은 교인들이 다 어디에 갔느냐고 물었습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어떤 교인 한 사람이 여기에 나오지 않은 많은 교인들이 앞에 있는 교회에 새로 오신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경우 보통 목사님들은 질투심 때문에 기분이 영 안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펜스 목사님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은 채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도 그 사람들처럼 건너편 교회에 한 번 가서 새로운 목사님 설교를 들어 볼까요."
다른 사람이 잘되고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축하할 때 우리는 질투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② 자신의 위치와 분수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28절을 보세요.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결코 아니며 그리스도 앞에 보내심을 받은 선구자(forerunner)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자기는 주연이 아니라 조연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했던 것이지요. 더욱이 29절에 가면 세례 요한은 자신은 신랑의 친구에 불과하며 진짜 신랑은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신부로서, 그리고 하나님은 신랑으로서 자주 묘사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하게 될 때, 이것을 신랑을 버리고 간음한 여자로 묘사한 경우가 많습니다(출 34: 15; 신 31: 16; 시 73: 27; 사 54: 5 참조). 이러한 맥락에서 신약 역시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비유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고후 11: 2; 엡 5: 22-32).
이제 세례 요한이 자기를 신랑의 친구로 말할 때 유대의 혼인 관습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신랑의 친구 'Shoshben'은 결혼식에서 아주 독특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부와 신랑 사이에 연락책의 역할을 했습니다. 결혼식을 다 주선하고 초청장을 보내고 피로연에서 사회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신부와 신랑을 다함께 모시고 나오는 일 역시 친구가 했습니다. 친구가 하는 아주 중요한 책임 중에 하나는 신부의 방을 지키면서 신랑 이외에 엉뚱한 사람이 신방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밤중에 신랑이 나타나서 음성을 듣고 신랑인 것을 완전히 확인할 때 신랑을 신부가 기다리는 방으로 안내한 다음에 기쁨에 겨워 떠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신랑 친구의 사명은 신랑과 신부가 만나서 하나가 될 때 끝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신랑이라면 우리는 신부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만나서 하나되는 일을 주선하고 준비한 신랑의 친구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이제 예수님과 우리가 서로 만나서 합해질 때 신랑 친구로서의 세례 요한의 책임은 끝이 납니다.
③예수님께서 무조건 흥해야 한다면 자기는 쇠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30절을 보세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자꾸만 일어나야 하고,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안내자로서의 자기는 자꾸만 줄어들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화려한 조명을 받으면서 스타로 부각될수록 자기는 이름 없이 무대 뒤로 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겸손한 세례 요한의 태도 때문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로 극찬을 하셨습니다(마 11: 11).
우리 사회가 평화롭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려면 세례 요한과 같은 겸손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고 나는 못되어도 좋다는 양보하고 손해보려는 각오만 되어 있으면 세상은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결어>
질투심을 잘 다스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질투심은 상대방을 해치며 이웃과 내 자신을 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례 요한 같은 마음만 품는다면 얼마든지 질투심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로운 공동체를 가꾸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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