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

욥기 강해설교(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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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1 16:24 조회1,4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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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닷의 첫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I):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너무 멀구나!"

<욥 9: 1-35>



 9-10장은 빌닷의 첫 번째 발언에 대한 욥의 응답인데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신학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평신도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난해한 신학적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제 9-10장에서 욥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매우 어려운 주제들을 펼치고 있습니다.

 

 

 1. 인간의 힘으로 판단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9: 2-31)



 욥 8: 3에서 빌닷은 '하나님의 공의'를 무기로 해서 욥을 공박했습니다.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빌닷에게 있어서 '하나님 = 정의의 집행자'라는 도식은 너무나 선명했습니다.

 

 

이것은 이미 엘리바스에게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욥 4: 17에서 엘리바스는 욥이 죄있고 깨끗지 못한 까닭에 고난을 당한다는 확신하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힘써 강조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있겠으며,

사람이 창조주보다 깨끗할 수 있겠느냐?" 바로 이와 같은 친구들의 주장에 대해서 욥은 반론을 제기합니다.

 

 

 

 2절을 보세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

인간이 아무리 의롭고 정직하고 순전하다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주장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진다는 주장과도 연결됩니다.

바울은 롬 3: 10-18에서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은 모조리 죄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인간의 행위나 공로와 상관없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의로워진다고 주장합니다. 인간 편에서 의로워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엘리바스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주장할 수 없는 이유를 전적으로 인간의 연약함 탓으로 돌렸습니다.

사람은 지혜도 부족하고(4: 21), 연약하고(4: 19-20), 오류와 죄가 있기 때문에(5: 6-7) 의롭다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주장할 수 없는 이유를 사람 쪽에서 찾는 엘리바스와 달리 욥은 그 책임을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힘과 지혜가 도무지 인간의 힘과 지혜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한하고 막강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은 아예 비교가 되지 않고,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주장하는 것은

아예 싹수가 없는 일이라는 절망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신학적 질문이 하나 제기됩니다.

정의의 문제를 논하는 것 자체, 즉 욥이 과연 자기가 저지른 죄악 때문에 이 고통을 당하는지 아니면

아무 잘못 없이 무고하게 이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어떤 공통 기반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그와 같은 공통 기반을 설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과 지혜는 인간의 힘과 지혜와는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자기의를 주장하거나 무죄성을 변호할 길이 완전히 차단되었다는 탄식이지요.

 

 

 자, 이런 맥락에서 3-4절 말씀을 보세요. "사람이 하나님과 논쟁을 한다고 해도,

그 분의 천 마디 말씀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니,

그를 거역하고 온전할 사람이 있겠느냐?" 또한 11-14절 말씀도 보세요.

 

 "하나님이 내 곁을 지나가신다 해도 볼 수 없으며, 내 앞에서 걸으신다 해도 알 수 없다.

 그가 가져가신다면 누가 도로 찾을 수 있으며, 누가 감히 그에게 왜 그러시냐고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진노를 풀지 아니하시면 라합(혼돈과 악의 세력을 대표하는 바다괴물)을 돕는 무리도 무릎을 꿇는데,

내가 어찌 감히 그분에게 한 마디라도 대답할 수 있겠으며, 내가 무슨 말로 말대꾸를 할 수 있겠느냐?"

 

한 마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너무 멀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를 주장하기에는

도저히 역부족이라는 탄식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기 때문에 욥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 비는 수밖에 없습니다. 15절 말씀을 보세요.

 

 

 "비록 내가 옳다 해도 감히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다만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나를 심판하실 그 분께 은총을 비는 것뿐이다."

 

여기 보세요. 바로 여기에 욥의 갑갑함, 하릴없는 절망이 묻어 있습니다.

 분명 욥은 자신의 결백과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무리 옳아도 하나님의 정의는 도무지 측량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편에서 변명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19절 말씀을 보면 자기의와 무죄성을 입증하기 위해 자기 문제를 재판에 부치고 싶어도 하나님을 재판정으로 불러 올 방법이 막연하다는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욥은 마침내 절망에 빠집니다. 20-22절 말씀을 보세요.

비록 욥이 옳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기를 정죄하실 것이며, 흠이 없다고 할지라도 자기를 틀렸다고 말하실 것이며,

 결국 하나님은 흠이 없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한가지로 심판하시는 불공평한 분이라는

비관적 결론에 도달하고 맙니다.
 
 욥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찾을 수 없음', '헤아릴 수 없음'에 깊은 곤혹과 좌절감을 느낍니다.

10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하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분으로서 사람의 힘과 지혜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이제 이와 같이 인간이 자기의와 무죄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변론하려고 해도 양자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 기반도 가지지 못했다는 절망감은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끕니다.

 

 

 

 2. 불가능한 재판에 대한 탄식(9: 32-35)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법정으로 가면 됩니다. 고소해서 법적인 심판을 받으면 됩니다.

욥의 경우, 자기 자신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고하게 고난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친구들은 욥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이라는 결과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기 마련인데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딜레마에 빠진 욥이 만일 하나님이 자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람이라면 함께 법정에 가서

 재판관 앞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으면 해결이 됩니다.

 

그 때 욥이 피고가 되고 하나님이 원고가 되어서 검사와 변호사의 공방을 거쳐,

 여러 증인들의 증언을 청취해서 과연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댓가로 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 아니면

아무 잘못 없이 무고한 형벌을 당하고 있는지 가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쌍방간이 다 받아들일 수 있는 합의된 기준이 있고 공정한 절차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닌 까닭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너무 멀어 자기나 하나님이 법정에 가서 공방을 펼칠 길이 없다는 탄식을 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자기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폭력에 의해 이해할 수 없는, 부당하고 억울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32-33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이 나와 같은 사람이기만 하여도 내가 그분께 말을 할 수 있으련만, 함께 법정에 서서 이 논쟁을 끝낼 수 있으련만, 우리 둘 사이를 중재할 사람이 없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판결해 줄 이가 없구나!" 욥은 자기의 정의 이해는 인간적인 이해이고 하나님의 정의 이해는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자신은 그저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이 고통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단순히 양적인 차이뿐만 아니라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편에서 그 어떤 유비(analogia)를 통하여 하나님을 설명해도 그것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욥도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도저히 건너뛸 수 없는 간격, 즉 질적 차이 때문에 고뇌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지금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처절한 고난을 당한다면 이유라도 알아야 할 터인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어디서 날아오는지 출처를 알 수 없는 기관단총에 집중 포화를 맞고 있는 형국이지요.

하나님이 사람이라면 욥이 왜 이 고난을 당하는지 설명해줄 수 있을 터인데,

또 서로간에 입장차이가 있으면 법정에 가서 하나님과 자기 사이를 판단해줄 수 있는 재판관의 판결을 받으면 끝날 터인데

그럴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욥은 경건과 선행의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불의와 악행의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전통 견해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욥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죄 없는 자기를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가해자일 뿐이라며 절규하고 있습니다.

 

 

 

 오늘 다행히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억울한 일이 생길 때마다 양쪽의 입장을 다리 놓아줄 수 있는 아주 좋은 중재자를 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긴장과 간격을 메우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100 % 참 하나님이시며, 100% 참 인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감추어져 숨어 계신,

그리하여 도무지 헤아리기 어렵고 접근하기도 어려운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욥이 예수 그리스도 오신 후에 이와 같은 고난을 당했더라면 그의 물음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을 것입니다.

 

 

 

욥에게는 중재자가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참 의로운 중재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오늘도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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