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

욥기 강해설교(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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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1 16:34 조회6,1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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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닷의 첫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II): "산다는 것이 이렇게 괴로우니"
<욥 10: 1-22>

 

 


 본문 말씀은 빌닷의 첫 번째 발언에 대한 욥의 두 번째 대꾸입니다.

여기서 욥은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절규합니다.

 

첫째로,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왜 당신이 손수 창조하신 자기를 괴롭히시는지 항의합니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창조의 목적과 의미를 묻는 것이지요. 욥은 현재 당하는

고난이 너무나 부당하고 극심해서 자기 존재의 기원, 즉 자기가 태어난 날과 잉태된 날 밤이 차라리 사라졌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너무나 힘든 일을 당할 때 "차라리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 하고 탄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지금 욥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할 때 당연히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본래 자기를 만드실 때에는 좋은 의도로 그리하셨는데

지금은 정반대로 까닭을 알 수 없는 무고한 고난을 당하고 있으니 자기를 지으신 창조의 목적과 의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욥은 또 한번 죽음을 희구하며 차라리 하나님이 자기를 떠나 달라고 간구합니다.

어도 욥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욥을 원수로 대하셔서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계시기에

하나님이 자기 곁을 떠나시지 않고서는 쉴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창조와 죽음에 대한 질문은 존재의 출발점과 종점에 대한 질문이며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흔히 집착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두 물음은 역설적으로 욥이 얼마나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만드신 창조주이시며 자기의 삶 속에 끊임없이 간섭하시는 주님이심을

 철두철미 믿기에 이렇게 청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1. 선하게 창조할 때는 언제고 지금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10: 1-17)



 우리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할 때 우리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원망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어버이 왜 나를 낳으셔서 이 고생하게 하셨지?"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다면

끝까지 보호해주셔야 마땅하지 창조 때와 달리 이 고통을 주시는 까닭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욥은 선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정성을 다하여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과거행위와

부당한 고통을 안겨주시는 하나님의 현재행위 사이의 괴리와 모순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다스리시고 보호하시고 완성하시는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하나 둘 만드신 후 연거푸 보시기에 좋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하나님 창조의 선성(善性)을 확신합니다. 이제 욥은 창조의 선성을 기초로 해서

창조 때와 현재 자신의 모습 사이의 너무나 달라진 간격에 대해서 괴로움을 쏟아냅니다.

 생명의 수여자로서의 창조주께서 지금은 자기의 삶을 위협하는 생명의 파괴자로서 행동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3절 말씀을 보세요.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이 몸은 학대하고 멸시하시면서도, 악인이 세운 계획은 잘만 되게 하시니

그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라도 됩니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정교한 작품을 만드는 장인(匠人)이라는 개념을 만나게 됩니다.

 

 

렘 18장은 하나님을 진흙으로 그릇을 빚는 토기장이로 비유했습니다.

욥 역시 하나님이 자기를 만드셨을 때 정성을 다하여 아주 선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신 장인이라고 봅니다.

 

그리하여 10장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 중에 하나가 욥을 빚을 때 정성을 다한 주님의 손입니다(3b, 7b, 8a).

그런데 이렇게 선한 목적을 가지고 온갖 정성을 다해 자기를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 지금 욥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십니까? 8-9절 말씀을 보세요.

"주님께서 손수 나를 빚으시고 지으셨는데, 어찌하여 이제 와서, 나에게 등을 돌리시고, 나를 멸망시키려고 하십니까?

주님께서는, 진흙을 빚듯이 몸소 이 몸을 지으셨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나를 티끌로 되돌아가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으실 때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너무나 차이가 난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계속해서 11-12절 말씀을 보세요. "주님께서 살과 가죽으로 나를 입히시며, 뼈와 근육을 엮어서, 내 몸을 만드셨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생명과 사랑을 주시고, 나를 돌보셔서, 내 숨결까지 지켜 주셨습니다."

주님은 욥을 정성껏 빚어 만드신 장인, 즉 창조주일 뿐 아니라 지키고 보호해주시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지금 욥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말입니까? 13-17절 말씀을 보면

 예전의 선하디 선한 창조주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욥을 해치실 생각을 품고, 그 어떤 죄도 용서치 않으시며,

 사나운 사자처럼 욥을 덮치시고 상처를 주시며 욥을 공격할 계획까지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욥이 탄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으실 때의 장인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당신이 선한 목적을 가지고 그토록 정성을 다해 만든, 위대한 작품인 자기를 시방은 해치고 계시냐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요 섭리라면 왜 굳이 자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느냐고 항의합니다.

 

선한 목적으로 정성을 다해 진흙으로 좋은 그릇을 빚으셨다면 끝까지 책임을 지셔야지 다시 깨부수어서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는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탄식이지요.

 

 

 

 2. 제발 나를 홀로 있게 해주세요!(10: 18-22)



 이제 자기를 지으신 장인으로서의 하나님이 당신의 작품을 내치시는 모순을 탄식하며 욥은

3장에서 이미 피력했던 죽음으로의 퇴행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18-19절 말씀을 보세요.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할 것이라면 왜 나를 모태에서 살아 나오게 하셨습니까?

 

차라리 모태에서 죽어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나 않았더라면, 좋지 않았겠습니까?

생기지도 않은 사람처럼, 모태에서 곧바로 무덤으로 내려갔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여기 보세요. 장인이 온갖 정성을 다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품에 어떤 위해를 가하면서 내친다면 왜 힘써 그 작품을 만들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항변이지요.

차라리 모태에서 죽어버려 곧바로 무덤으로 갔더라면 이 꼴을 보지 않고 얼마나 좋았겠느냐며 한탄합니다.

 

 

 이제 이와 같은 죽음으로의 퇴행 의식은 욥으로 하여금 제발 자기를 혼자 내버려두라는 청원으로까지 이어집니다.

20절을 보세요. "내가 살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나를 좀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게 남은 이 기간만이라도, 내가 잠시라도 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욥은 자기를 극한 고난으로 내몰고 있는 하나님이 계시는 한 자기에게 안식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욥은 21-22절에서 하나님이 자기 곁을 떠나가심으로서 스올,

즉 다시 돌아오지 못할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기 전에 잠시 안식을 누리게 해달라고 호소합니다.

욥의 고난이 얼마나 극심한 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하나님이 정성을 다해 빚은 선한 피조물을 왜 끝까지 잘 돌보지 못하시고 내 치시는가?" 하는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와 관계된 문제입니다.

렘 18: 1-6은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자유를 강조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잘못 빚을 경우 그 그릇을 깨뜨리고 다른 그릇을 빚을 주권과 자유가 있듯이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마음에 어긋날 경우 깨뜨리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욥은 견디기 어려운 부당한 고난을 당하면서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토로합니다.

왜 그렇게 선한 목적으로 정성을 다해 손수 빚으셨다면 끝까지 자기를 선대하여 아름다운 모양으로 간수하셔야지

되려 원수가 되어서 자기를 이토록 괴롭히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항의와 절규는 욥이 의미 없는 고난을 당하면서 그 의미를 파헤쳐나가는 과정에서 던질 수 있는 일시적 질문이며

아직 욥의 최종적인 입장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우리가 욥의 문제 제기에 대하여 두 가지로 응답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예레미야가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은 진흙으로 작품을 빚을 수도 있고 깨부실수도 있는 절대 주권과 자유를 가진 분이라는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욥을 지금과 같이 험하고 아프게 다루는 것도 욥을 지으신 작가로서의 하나님 마음이라고 풀이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이 경우 욥이 험하고 아프게 취급받아야 할 아무런 신앙적 윤리적 이유 없이 부당하게 그렇게 된다면

욥을 지으신 작가, 장인으로서의 하나님의 윤리성이 심각하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인 경우 어떤 조각가가 고상한 목적을 가지고 지극 정성을 다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자기 맘에 들지 않을 경우 발로 차고 깨뜨리고 해서 완전히 파괴시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처럼

순전히 작가의 자유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조각가와 작품의 경우와 달리 하나님과 인간의 경우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에

납득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 없이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을 괴롭힌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둘째로, 고난에 대한 교육 훈련용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정금과같이 연단시켜서 더욱 훌륭한 신앙인으로 만드시기 위함으로 해석하는 것이지요.

욥의 경우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설득력이 높습니다.

 

 

다시 말해 장인으로서의 하나님은 지금 당신이 손수 만드신 작품으로서의 욥에게 여러 가지 위해를 허락하고 계시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부분적일 뿐 욥의 신앙 인격이 합격점에 이르렀다고 판단될 경우에

 모든 고통은 끝이 나고 욥은 그 옛날 이상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해석이 욥기가 취할 자연스러운 결론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Divine Pedagogy,' 즉 하나님의 교육 훈련용으로 보기에 도저히 정도가 지나친 악과 고난의 경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욥의 경우도 엇비슷하지만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히틀러 나치 정권에 의해 멸절당한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의 경우

 하나님의 교육 훈련으로서 해석하기에 지나치게 가혹하고 비대칭적인 악과 고난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해석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제 3의 대답이 있을지 우리는 계속해서 욥기를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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