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설교(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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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1 16:46 조회7,037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소발의 첫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I): "너희가 지혜를 전세라도 냈느냐?"
<욥 12: 1-25>
소발의 시건방지고 격정적인 발언에 대해 욥은 응답을 시도합니다.
욥이 보기에 세 명의 친구들이 도덕적 인과율의 논리로 심문하고 정죄하는 데에는 조금의 차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발 한 사람만이 아닌 세 사람 모두를 상대합니다. 12-14장은 소발의 공박이 끝난 뒤 욥이 한 대답입니다.
지금까지 욥이 해 온 대답치고 가장 긴 분량입니다. 이것은 엘리바스와 빌닷, 소발 세 친구들의 발언이 다 끝남으로
첫 번째 사이클의 논쟁이 종결됨으로서 결론을 내리고자 했기 때문에 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4장에서 엘리바스의 말로 시작된 친구들과의 논쟁이 11장에서 소발의 공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전개되어 왔는데, 이 첫 바퀴 대화에 대한 결론을 피력하다보니 다소 장황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본문 말씀은 주로 지혜 문제, 즉 친구들과 욥의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욥은 먼저 친구들이 지혜로운 척 하는 것에 대해 통박하면서 자기도 그들 못잖은 지혜를 갖추고 있다고 응수합니다.
그 다음에 우주 만물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자연 일반의 지혜를 언급합니다.
그런 뒤 욥은 그 엄청난 하나님의 지혜가 때때로 이 역사 안에서는 안정과 유지가 아닌 불안정과 파괴로 나타나는
모순과 역설, 부조리에 대해서 말합니다.
1. 지혜의 독점자로 자처하는 친구들에 대한 반박(12: 2-6)
소발은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지혜를 찬양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욥의 미련함까지 물고 늘어졌습니다.
이것은 은근히 자기가 욥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과시하는 언동이었습니다.
아주 시건방지고 학자연체 하는 태도가 아닐 수 없지요. 그런데 욥이 보기에는 소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세 명이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욥에게 지혜를 한 수 가르치려 드는 선생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들이 마치 지혜를 전세라도 낸 양 으스대는 소발을 비롯한 친구들을 향하여 욥이 포문을 엽니다. 2-3절 말씀을 보세요.
"지혜로운 사람이라곤 너희밖에 없는 것 같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너희와 함께 사라질 것 같구나.
그러나 나도 너희만큼은 알고 있다. 내가 너희보다 못할 것이 없다. 너희가 한 말을 모를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욥도 지혜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지혜가 있다는 말입니다.
친구들만 지혜의 달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어 욥은 4절에서 자기도 한 때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동방의 의인으로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큰 지혜의 사람이었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친구들에게 조롱이나 받는 처지로 전락되었다고 탄식합니다.
자, 그러면서 욥은 5절에서 대단히 중요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너희가 불행한 내 처지를 비웃고 있다.
너희는 넘어지려는 사람을 떠민다." 이 말은 욥과 친구들의 처지와 입장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친구들은 욥과 같이 극심한 고통을 당해 보지 않았기에 욥의 형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공감과 위로보다는 심문과 정죄로 일관하면서 욥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욥과 처지가 다른 친구들은 넘어지려는 사람을 떠 밀 듯이,
물에 빠진 사람을 물에 밀어 넣듯이 욥을 더욱 더 큰 고통의 나락으로 빠뜨리고 있다고 고발합니다.
여러분, 처지와 입장의 차이, 고난을 이해함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포인트인지 모릅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 유학 가서 가장 힘든 일이 언어 문제였습니다. 듣기는 대충하겠는데 말하기와 쓰기는 정말 어려웠습니다.
교수님들 가운데 학업이나 다른 이유 때문에 외국 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저의 처지를 잘 이해해주셨습니다.
여러 가지 미흡한 점이 많았지만 항상 격려부터 먼저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입장에 처해보지 않은 분들은
외국 학생이 언어 장벽을 딛고 공부를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이해를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국내 학생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대했습니다. 그 때 저는 입장의 차이가 이다지도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지요.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해본다는 말입니다.
빛나는 논리와 기막힌 지혜로 무장된 친구들의 말이 욥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바로 양자간의 입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의 처지를 얼마나 이해하는가? 배운 사람은 배우지 못한 사람의 처지를 얼마나 고려하는가?
성공자는 실패자의 처지를 얼마나 헤아리는가?
사용주는 노동자의 권익을 얼마나 앞세우는가?
이런 물음들은 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화목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하여 매우 중요합니다.
친구들은 욥과 같이 가슴을 후비는 무고한 고통을 당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욥의 입장을 이해할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욥이 지금 고통 당한다는 현실만 주목하여 욥을 죄인으로 몰아 부칠 뿐입니다.
서로 다른 위치를 극복하지 못하기에 고통 없는 자들이 고통 당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실패자로 정죄할뿐이지요!
이것이야말로 입장의 차이가 가져온 폭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6절 말씀도 중요합니다. 친구들이 그토록 강조한 도덕적 인과율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는 먹혀들지 않는다는 탄식이 아닙니까?
"강도들은 제 집에서 안일하게 지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도 평안히 산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까지 자기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다."
세 친구들의 논리대로 한다면 강도는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제 집에서 평안하게 지냅니다.
이 사회에 권력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뇌물로 수억씩을 꿀꺽 꿀꺽 삼키면서도 존경받고 평온하게 잘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하나님을 부인하고 경건치 못한 사람들이 형통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습니까?
욥은 지금 세 친구가 그토록 강조한 도덕적 인과율에 부합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거꾸로 말해서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전하게 살아도
부당한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로 많다는 냉소이기도 합니다.
2.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삼라만상의 지혜(12: 7-12)
소발은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지혜의 4차원성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늘보다 높고, 스올보다 깊고, 땅 끝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다는 것이지요. 이제 욥은 이러한 소발의 말을 맞받아 칩니다.
이러한 지혜, 즉 10절에서 말씀하는 것과 같이 일체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지혜는 자연 세계의 4대 영역에 있어서도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7-10절을 보면 땅의 짐승들, 공중의 새들, 땅(지하), 바다의 물고기들도 다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인간을 비롯한 일체의 생명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자연만물도 다 알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짐승들과 새들과 땅과 물고기들도 다 아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혜가 현실에 있어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느냐 하는 사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현재의 세계와 역사를 주관하고 유지하시는 모습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부조리한 현실이 문제입니다.
3. 역설과 모순, 부조리로 가득찬 세계 현실(12: 13-25)
욥은 친구들은 물론이고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것은 짐승들과 공중의 새들과 들풀들과 물고기들조차도 알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혜입니다.
이 지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13-16절 말씀에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와 권능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며,
슬기와 이해력도 그분의 것이다. 하나님이 헐어 버리시면 세울 자가 없고,
그분이 사람을 가두시면 풀어 줄 자가 없다. 하나님이 물길을 막으시면 땅이 곧 마르고,
물길을 터놓으시면 땅을 송두리째 삼킬 것이다. 능력과 지혜가 그분의 것이니,
속는 자와 속이는 자도 다 그분의 통치 아래에 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최고의 지혜와 권능을 가지신 분으로서 일체의 생사화복이
다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삼라만상도 다 알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17-25절까지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계와 역사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과는 정반대로 작동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인과율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 무질서와 파괴로 치닫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 무한한 지혜와 권능으로 고관들을 벗은 몸으로 끌려가게 하시며 재판관들을 바보로 만들기도 하십니다.
왕들이 결박하는 줄을 푸시고 거꾸로 왕들을 포박하십니다…등등.
그런데 여기 17-25절까지 욥이 예로 든 모든 경우는 거의 다 부정적인 측면만 부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세우시는 예는 거의 들지 않고 모조리 죽이시고 무너뜨리시는 부정적인 경우만 들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친구들이 일사불란하게 주장했던 도덕적 인과율이 이 세계 속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척척 들어맞는다는
통상적인 지혜를 반박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죄를 저지른 악인들만 거기에 대한 응벌로서
고난을 주신다고 본 반면에 욥은 죄없는 사람들도 무너뜨리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친구들에게 있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악인들이어야 하는데 반하여, 욥이 예로 든 경우에는 악인이요
죄인이라는 이유와 설명이 일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그저 하릴없이 하나님의 권능의 손아래 무너지고 쓰러질 뿐입니다. 죄없는 의인도 쓰러질 수 있다는 강한 암시이지요!
여기에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신비가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지혜가 너무나 엉뚱한 방향으로 무질서하게 진행되는 역사의 부조리한 현실을 정직하게 고발합니다.
4.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입장의 차이,' 이것이 오늘 말씀의 화두가 아닌가 싶습니다.
친구들과 욥 사이에는 입장의 차이가 너무나 극명했습니다.
아무 죄도 없이 무고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 욥과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을 당한다고 본 친구들은 각기 처한 형편이 달랐습니다.
그들이 만일 욥이 당하는 부당한 고난을 지금 함께 당하고 있다든지,
아니면 적어도 과거에 비슷한 경험이라도 한 적이 있었다면 욥을 그런 태도로 공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고통 없이 여유로운 자요 평온한 자이기에 과거의 빛나는 지혜 전승으로 무장한 제 3자, 객관적 관찰자의 입장으로서 다가 올뿐입니다.
그리하여 역지사지가 안 되기 때문에 서로가 대화의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어긋나게 됩니다.
욥이 하나님의 우주 통치에 대한 통상적인 지혜에 거슬려 여러 가지 무질서하고 파괴적인 사례만 골라서 든 것도 입장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고통과 무관한 친구들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엄격한 인과율에 따라 신상필벌(信賞必罰)이 어김없이
이루어지는 이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질서와 정의가 잘 잡힌 곳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러나 욥과 같이 부당한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깨지고 쓰러지는 사람들만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에 걸맞지 않는 역설과 모순과 부조리만 부각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올바른 의사소통을 하고 조화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도 입장의 차이를 메워나가야 합니다.
"내가 만일 저 사람의 처지에 놓인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며 먼저 상대방의 입장을 정중하게 헤아린다면
이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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