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

욥기 강해설교(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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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1 17:40 조회2,2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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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발의 첫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II): "돌팔이 의사들 같으니라고"
<욥 13: 1-19>

 

 

 

 본문 말씀은 욥이 소발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계속해서 응답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욥은 매우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더불어 무익한 논쟁을 하는데 지쳐버려서 하나님을 향하여 직접 항의하겠다는 것입니다.

친구라는 것들이 다 속 터지는 소리만 하고 있는 것에 염증을 느껴서 이제 직접 하나님께 진실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속사정을 다 털어놓고 이 부조리한 고난에 대한 이유와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따지고 싶다는 것이지요.

 

 

 

 1. 친구들에게서 하나님으로(13: 1-12)



 지금까지 전개되어온 첫 바퀴 논쟁을 살펴보면 친구들은 항상 일방적이었습니다.

선생인 냥 훈계하고 교정하는 방식으로 욥을 마구잡이로 몰아 부쳤습니다.

어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들은 고통 없이 안일한 입장에서 까닭을 알 수 없이 고통 당하는 욥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욥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친구들을 향하여 포문을 엽니다.

1-2절을 보세요. 친구들이 말하는 것들을 욥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고 또렷이 들어서 다 아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이런저런 이론들을 늘어놓는데 욥도 친구들 못지 않게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몰라서가 아니라 참을 수 없게 괴롭다는 실존적 현실이 문제입니다.

알기는 아는데 극심한 고통이 그 앎을 순순히 용납하지 않는다는데 괴로움이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어설픈 지식으로 욥을 심문하고 정죄하는 친구들은 돌팔이 의사나 다름없습니다. 4-5절을 보세요.

친구들은 무식을 거짓말로 때우는 사람들이요 돌팔이 의사 같다는 것, 아닙니까?

모르면 차라리 입이라도 다물고 있었으면 좋겠는데 입까지 나불거리니 도무지 진리와 거리가 멀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들이 몰라서 놓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정통 신학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보존의 신비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에 대해서 무지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무지한 것은 이런 이론들이 자기처럼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적용이 되지 않는다는 복잡한 현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마치 의과대학 말년차의 수련의와 법과대학 말년차의 법률 수련생이 아직 임상 경험이 부족해 이론만 가지고

환자와 고객을 돌보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학교에서 배운 이론과 실제 경험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의학이나 법률 이론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기계적으로 척척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한 예외가 부지기수로 산재해 있습니다.

 

좋은 의사와 좋은 법률가는 이와 같이 다양하고 복잡한 임상 현실에 대한

매우 심층적인 이해와 경험을 통하여 점점 더 훌륭한 의사와 율사로서 성숙해집니다.

욥의 친구들은 이렇게 의대에서 배운 의학 지식을 가지고 일반적인 의학 상식을 벗어난,

아주 희귀한 질병을 앓는 환자를 치료하겠다고 나선 수련의와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그들은 욥을 이 질병에서 고친다고 호언하지만 더 큰 아픔만 안겨줄 뿐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친구들은 돌팔이 의사와 진배없는 것이지요.    

 

 또한 욥이 보기에 친구들은 진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도덕적 인과율로 고난을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가 훨씬 더 복잡한 이 세상의 현실을 정직하게 보지 못하는 허위요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이들의 말을 '허튼 소리'요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을 빌미 삼아 던지는 알맹이도 없는 말'이요(13: 7),

'한낱 쓸모 없는 잡담일 뿐이요' '흙벽에 써 놓은 낙서'(13: 12)에 불과하다고 혹평합니다.

 

이들도 양심이 있기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로운 사람이 원치 않는 고난을 받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의한 사람이 형통하는 경우를 수없이 경험했을 터인데도 단지 하나님을 변호한다는 명목으로

그 엄연한 현실을 은폐하고 왜곡한다는 것이지요. 9-11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이 너희를 자세히 조사하셔도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이듯, 그렇게 그분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으냐?

거짓말로 나를 고발하면, 그분께서 너희의 속마음을 여지없이 폭로하실 것이다.

그분의 존엄하심이 너희에게 두려움이 될 것이며, 그분에 대한 두려움이 너희를 사로잡을 것이다."

 

친구들의 허위를 찌르는 통렬한 비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시며 선하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세상에 분명 부조리한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적어도 욥이 확신하는 하나의 진리는 하나님께서 바로 이러한 모순과 부조리를 역사 안에 허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친구들은 그렇지 않은 척, 은폐하면서 마치 하나님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이 온갖 위선과 만용을 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들의 속마음까지 다 살피시는 하나님께 자기가 직접 대면해서 나서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전능하신 분께 말씀드리고 싶고, 하나님께 내 마음을 다 털어놓고 싶다"(13: 3절).

 

 

 

 2.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을 토로하는 욥(13: 13-19)



 욥은 친구들에게 자기의 운명을 맡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대면하면서 자기 운명을 자기 스스로 책임지겠다고 나섭니다.

 그런데 그 모습에 매서운 결기가 있습니다. 14-16절 말씀을 보세요.

 "나라고 해서 어찌 이를 악물고서라도 내 생명을 스스로 지키려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나를 죽이려고 하셔도,

나로서는 잃을 것이 없다. 그러나 내 사정만은 그분께 아뢰겠다.

적어도 이렇게 하는 것이, 내게는 구원을 얻는 길이 될 것이다.

 

사악한 자는 그분 앞에 감히 나서지도 못할 것이다." 여기 보세요. 이제 재산도 가족도 다 잃어버리고

 목숨 하나만 달랑 남았으니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진실을 주님께 알리겠다는

 결연한 태도를 보입니다. 욥은 친구들의 충고에 귀 기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죽음을 무릎 쓰고 진실을 따지는 것이

 자기에게 남은 유일한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더 이상 마지막 남은 목숨까지도 친구들에게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당당히 맡기겠다는 의지이지요.

 이것은 욥이 철두철미 자신의 무죄성을 확신한데서 온 양심과 용기에서부터 온 것입니다.

 

사악한 자는 감히 하나님 앞에 나서지도 못하겠지만 자기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자기의 결백을 아뢸 만큼

떳떳하기에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 신고(辛苦)를 자기에게 허락하셨는지 기어코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것이지요.

 "너희는 이제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라. 나를 좀 보아라, 나는 이제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내게는, 내가 죄가 없다는 확신이 있다"(13: 17-18).

이제 친구들을 제치고 하나님께 직접 따지는 욥의 다부진 모습을 지켜볼 차례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두 가지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첫째로, 우리 자신이 돌팔이가 아닌가 자문해봐야 합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어설프게 아는 우리의 지식으로 이웃을 어렵게 한 적은 없는지요?

 깊은 고뇌와 실제적인 경험 없이 단지 이론만 가지고 이웃을 함부로 판단한 적은 없는지요.

 

 저 역시 옛날을 돌아보면 돌팔이라는 자괴감이 듭니다.

 새파란 목회 초년병 시절 어줍잖은 신학 지식을 가지고 목회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사람들을 판단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점점 더 연륜이 쌓이다 보니 세상은 훨씬 더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도양단(一刀兩斷)식으로 흑백논리로 판단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다양한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문제, 다양한 경험을 안고 산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마다 형편과 처지가 다르기 때문에 딱 정해진 법칙은 없다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부분만 보고 그 사람이 "믿음이 있다, 없다,"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판단하는 일을 점점 더 유보하게 되었습니다.

점점 모호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섣부른 오만과 편견은 거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금 더 알고 더

 의롭다는 교만과 착각으로 이웃을 오도하는 돌팔이, 우리는 돌팔이가 되어서 안될 것입니다!

 

 둘째로, 진리를 알기까지 결사각오로 하나님께 자기 사정을 아뢰고야말겠다는 욥의 치열한 정신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는 말도 있지요.

옳은 일을 위해 목숨까지 버린다는 말이지요. 욥은 자신이 왜 이렇게 부당한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친구들로부터는 아무런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예레미야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들의 상처를 치료한다고 공언하면서 "괜찮다! 괜찮다!"고 거짓말을 외치듯이(렘 6: 4; 8: 11) 

친구들의 말이란 욥의 고통과는 아랑곳없이 내뱉는 쓸모 없는 잡담이요 흙벽에 갈겨 쓴 낙서일 뿐이었습니다.

 

이제 욥은 마지막 하나 남은 목숨마저 잃더라도 자신의 걸어온 발자취를 하나님께 낱낱이 털어놓겠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오늘 우리도 사느냐 죽느냐 하는 우리 운명의 문제를 다른 사람의 지식이나 경험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과 대면해 깨달을 수 있는 정직과 용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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