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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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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0:04 조회4,7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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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요 1: 6-13>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또한 우주만물 모두가 말씀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의 빛이 있었습니다.  빛되신 예수님이 세상의 어둠을 비추었지만 세상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이 세상이 어떻게 반응했는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한 사람의 예언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대하여 말한 뒤, 세상과 자기 백성들--즉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었던 유대 민족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뒤 예수님에 대한 무지와 불신 한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영접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 세례 요한은 빛되신 예수님을 증거했던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아마도 예수님 다음으로 초대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일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나타나기 전까지 근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참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 할 때 세례 요한이 혜성처럼 나타나서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그는 광야에 나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마 3: 1-12 참고).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매력을 느꼈고 날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을 듯 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을 어떤 교주나 메시아로 숭배하는 소종파(sect)가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세례 요한을 최고의 선지자로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행 19: 1-7을 보면,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 선교하러 갔을 때 이 지역에는 세례 요한의 세례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초대교회에는 세례 요한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꽤 많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던 에베소 지역에서 요한복음이 쓰여졌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영향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피부로 느끼고 있었던 요한복음의 저자가 세례 요한은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를 증거하는 한 안내자에 불과함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요한복음을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볼 때,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못한 사람임을 유달리 강조하고 있습니다(요 1: 15, 30; 3: 25-30과 그밖에 1: 8, 19, 29, 35; 5: 33을 참고하라.)  이것은 아마도 에베소 지역에서 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잘못 알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분명한 가르침을 주기 위한 의도로 풀이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제 아무리 뛰어난 선지자요, 개혁가요, 설교자였다고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6절)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심에 비해 요한은 하나님께 매어 있는 하나님의 사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빛되신 예수님을 증거(witness)하고 자기를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는 사명을 타고났습니다(7절).  다시 말해 예수님만이 참 빛이요, 요한은 그저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안내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참빛이며 우리 예배의 참대상이 되신 예수님과 그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사역자들에 대하여 잘 분별하는 영적인 눈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대형교회를 일으켜서 카리스마적인 위치를 확보한 일부 목회자들이 마치 자기가 참빛이며 예배의 대상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잘못된 풍조를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 예배의 주인이시며 청중이심을 확인해야 합니다.  참빛과 이 빛에 대한 증인 사이를 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달을 쳐다본다면서 달을 가리키는 자기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에게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찰스 스펄젼(Charles Spurgeon) 목사님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19세기 영국 런던에서 가장 큰 교회를 섬기시던 분입니다.  이 분이 담임하고 있던 교회는 매주 약 6천여 명의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느 주일에 스펄젼 목사님이 여행을 가시는 바람에 다른 강사 목사님이 주일설교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가운데 수백명의 사람들이 스펄젼 목사님이 아닌 다른 목사님이 설교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바로 이 때 임시 설교를 맡은 목사님은 매우 지혜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는 예배 도중 떠나려는 사람들을 향하여, "여러분 잠깐만 계십시오.  만일 여러분들이 오늘 아침 찰스 스펄젼 목사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셨다면 그냥 그대로 떠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들이 저와 함께 예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오셨다면 떠나지 마시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계십시오."  우리의 예배 대상은 예수님이심을 한 순간도 잊어서 안될 것입니다.  참빛과 이 빛에 대한 증인 사이를 잘 구별해야 합니다. 

 2.  참빛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 사람들은 이 빛을 물리쳤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각 사람에게 골고루 비추셨습니다.  또한 빛으로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어졌건만 세상은 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외롭게 떠 있는 별 하나가 아니라 이 세상 한 가운데 빛으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땀냄새 나는 세상의 현장 한 가운데 직접 오셨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로고스, 즉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하나님의 마음이시며,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도무지 알지 못했다고 본문 10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참빛을 알지 못했을까요?
 
 (1) 세상 밖을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Look outwards!).  삼라만상의 오묘한 운행질서를 한번 주목하여 보십시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어떻게 순환합니까?  어떻게 태양을 중심으로 우주행성들이 질서 있게 순환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밤과 낮이 주기적으로 바뀝니까?  어떻게 씨앗을 뿌리면 거기서 열매가 나옵니까?  우주의 규칙적인 질서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로고스, 즉 하나님의 지혜와 생명과 마음이 이와 같은 자연질서를 가능케 한 것 아닙니까?  시계의 초침과 분침, 시침이 정확히 돌아가면서 시간을 알려주는 것은 시계를 만든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세상 밖의 우주만물을 바라보고 그 신기한 질서에 감탄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로고스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하늘 위를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Look upwards!).  하늘은 끝이 없습니다.  하늘은 뚜껑이 없습니다.  사람을 희랍어로 '안트로포스'(anthropos)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직립보행을 하면서 위를 쳐다볼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땅 밑만 쳐다보는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로고스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만이 만물을 훌쩍 뛰어넘어 계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3)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Look inwards!).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의 한계 내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른바 자연이성으로서는 신인식이 불가능함을 입증해서 계몽주의의 여명이 동터오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결국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어떻게 인정하게 된지 아십니까?  하늘 위에서 반짝이는 별들과 자기 마음 속에 빛나는 양심 때문이었습니다.  저 하늘의 빛나는 별들, 그리고 우리 마음 속에 살아있는 양심,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결코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듯이(창 1: 27), 하나님의 마음의 법, 곧 로고스가 없으면 인간은 결코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내면의 세계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들어앉아 계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동아리를 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참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세상 사람들은 먹고, 돈벌고, 자식 키우고, 잠자고, 노느라고 자연 세계 밖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쳐다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땅에 것만 열심히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차분히 성찰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참빛이 두루 비췸에도 빛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 빛을 미워했습니다. 

 이와 같이 참빛을 미워하고 물리친 대표적인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은 동족이었던 유대 백성들이었습니다.  유대 민족들 가운데에서도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특히 참빛이신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둠 속에서 하던 그들의 무지함, 어리석음, 죄악들이 백일하에 드러나기 때문에 이것이 두려워서 그냥 어둠에 갇혀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3.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입니다.  이름은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대변해 줄 때가 있습니다.  오래 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들의 얼굴이나 추억거리가 쉽게 떠오르지 않아도, 아무개 이름을 대면 그 친구의 모든 것이 생각이 납니다.  이름은 바로 우리의 정체성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이름은 특히 중요했습니다.  시 9: 10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여기서 '주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앎으로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이 하시는 위대한 일을 잘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시 20: 7은 말씀합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 속에 하나님의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것을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것, 그 분의 성품과 사역, 등등 예수님의 인격 전체를 신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로고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와 하나님의 마음이심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데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남자와 여자가 결합함으로서 생기는 자연적 출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적인 방법이나 사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방법으로, 즉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다는 뜻입니다. 

 옛날 임금들이 나라를 통치할 때 백성들이 임금과 어떤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길은 먼저 임금이 자기 마음에 드는 백성에게 나아갈 때에만 가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의 의지로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를 베풀어주실 때에만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결어: 참빛이신 예수님이 오늘도 이 세상을 비추십니다.  어떤 이들은 눈과 귀를 닫고 그 빛을 외면하며 여전히 어둠 속에 거합니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영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믿고 깊이 감사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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