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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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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0 11:31 조회4,5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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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강해 (41): 모두가 "예" 할지라도  

         <요 7: 45-52>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서 만사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대통령이나 국회위원을 뽑을 때 투표를 합니다.  또한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무기명 비밀 투표를 하든지 아니면 거수 투표를 해서 한 표라도 더 많으면 그 쪽으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절대 다수가 원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는 일이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투표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있을 경우 더더욱 민주적인 투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아는 일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회들이 민주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해 나갑니다.  각 부서와 위원회가 있어서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서 의사(議事)를 결정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길을 걸어갈 때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것은 매우 인본적인 것이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때로 사람들 숫자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왜곡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감독이나 총회장 같은 교단장 선거를 표대결로 결정하는 것을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표를 던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는 한, 민주적 투표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짜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들이 다 "예!" 하면서 동의해도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아니오!"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본문은 초막절 기간 동안에 일어난 소동의 결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상한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지 체포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하속들, 즉 성전을 지키던 '성전 경찰'(temple police)이 당시 예루살렘의 유대교 지도자들이었던 자기들에게 왔을 때 대뜸 왜 예수를 잡아오지 않았느냐고 다그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체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논쟁이 세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일어납니다.  먼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골탕먹이고 잡으려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둘째로, 양심 때문에 자기가 속한 집단의 뜻을 따르지 않는 하속들이 있습니다.  셋째로, 양틈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뇌하는 지식인 니고데모가 있습니다. 

 

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집단의 힘으로 진리를 거슬리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로 나타납니다(요 1: 19, 24).  특히 요 18: 28-19: 16을 보면, 유대인들과 더불어 대제사장들은 빌라도 총독을 설득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던 장본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다수의 세력이었고 언제든지 큰 음모를 벌일 수 있는 힘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성전 경찰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온 것에 몹시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하속들을 다그칩니다.  이 때 하속들까지 예수님을 변호하는 말을 하게 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하속들은 자기들이 이 때까지 예수님처럼 말하는 사람을 일찍이 보지 못했노라고 대답했습니다. 

 47절에 보면 기가 찬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너희도 미혹을 당했느냐?"고 추궁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다 사기꾼에게 속아넘어가듯이 미혹된 것으로 보았던 이들은 하속들까지도 미혹당한 것으로 치부합니다.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속아넘어갔기 때문에 예수님을 체포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48-49절에서는 한층 더 오만한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고 있습니다.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인들 중에는 아무도 예수를 믿는 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잘 알기 때문인데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지렁이들이나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고 빈정거린 것입니다.  그래서 49절에서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혹평을 합니다. 

 참으로 못된 심사요 교만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잡아오지 못한 하속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에 무지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꾀임에 속아넘어갔을 뿐 아니라 저주받아 마땅한 자라고 힐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맥락으로 볼 때 하속들을 한심하게 생각한 나머지 저주하기 위해서 이 말을 했던 것입니다.  오직 자기들만이 율법에 대해서 제일 잘 알고 속아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똑똑하고 지혜롭기 때문에 예수의 거짓을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다는 교만에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② 하속들은 양심과 진리에 입각해서 예수님을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하속들은 성전 경비를 맡은 경찰들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편이 되겠습니까?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한 통속이 되어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한솥밥을 먹는 처지로 다수결의 원칙을 따른다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 편을 들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을 잡아오기는커녕 이상한 말까지 서슴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예수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까 지금까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같은 분을 처음 보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은근히 자기들도 예수님 말씀에 은혜받고 믿게 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같은 편에 속했다고 할지라도 진리와 양심을 따라야 합니다.  한국은 유난히 소속감을 강조합니다.  이른 바 '삼연'이라고 해서 '혈연,' '지연,' '학연'을 따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 남이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편이면 그 사람이 아무리 잘못되어도 무조건 편을 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태도 때문에 한국에서는 지역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정책이 어떻든, 그 사람의 인물됨이 어떻든지 간에 자기 고향 사람이면 무조건 찍어준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고, 나라 전체가 망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자기가 소속된 사람 편을 드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진리와 양심을 따를 때 개인은 물론이고 나라 전체가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하속들이 위대한 것은 높은 사람 밑에 있는 힘없는 부하, 말단 직원에 불과했지만 윗사람 눈치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진리와 양심을 따랐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끼친 인상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속들같이 모두가 다 "예!" 하더라고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건강한 사회요 미래가 있는 사회인 것입니다. 

 

③ 니고데모는 양심으로는 예수님을 지지했지만 행동으로는 주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하속들과 말다툼을 하고 있을 때 니고데모가 등장한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요 3장에 보면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요 3: 5 참조)을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는 유대의 국회인 산헤드린의 의원이었으며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함께 한 자리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얕잡아 보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자기들 빼놓고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 무리들은 다 율법에 무식한 무지렁이들이라고 폄하했을 때 조금 분개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양심적으로 즉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분개했을 뿐, 머리나 행동은 괜히 편 잘못 들었다가 당하게 될 망신이나 피해를 고려해서 적극적으로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51절 말씀에 보면,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하면서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출 23: 1과 신 1: 16에 있는 율법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을 판단하려면 공정한 절차를 통해서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고 또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보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 심판해야 옳다는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니고데모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다수가 힘으로 밀고 나올 때 적극적으로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 마음이 약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양심으로는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또 믿고 싶었지만 머리로는 만에 하나 집단적으로 왕따를 당한다든지 어떤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그 이상 나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말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점잖게 율법적인 정석(定石)을 말하는 니고데모까지 싸잡아서 핀잔을 주고 있습니다.  52절을 보세요.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지방 감정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갈릴리 같은 촌동네에서 무슨 선지자가 나올 수 있겠느냐 하면서 혹시 너도 갈릴리 출신이라서 이런 정신나간 말을 하는 것이 아니냐고 빈정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나중에 예수님을 믿어서 요 19: 39에 보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까지 지내주었습니다.  이렇게 나중에는 동료들이나 다수 집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적극적인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다수의 눈치를 보면서 혹시 왕따나 당하지 않을까 하면서 절반 정도만 자기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힘에 좌우 당하지 않고 진리와 양심을 따르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두가 "예!" 할지라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오늘도 찾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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