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

요한복음 강해설교(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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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2-31 15:45 조회4,9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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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설교(56): '부활과 생명의 주님' <요 11: 17-27>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기사는 요한복음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 사건을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signs) 혹은 기적들 중에 절정의 자리에 놓고 있습니다.

흔히 요한복음 1-12장은 '표적의 책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중에서도 나사로 이야기는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 중에 일곱 번째였으며 최고의 표적이었습니다. 특히 사람을 다시 살린 기적은 이것말고는 없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나사로가 중병이 걸렸다는 소식을 누이들, 마르다와 마리아가 보낸 사람을 통해 들으셨습니다.

 

주님이 끔찍이 사랑하셨던 친구의 소식을 들었지만 주님은 즉시 베다니로 가지 않으시고 이틀 동안 머무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제자들과 더불어 베다니로 가셨는데 나사로가 무덤 속에 있은지 벌써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수많은 조문객들이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를 위로하기 위하여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을 영접하러 나온 마르다와 예수님 사이에 오간 대화를 담고 있습니다.

본문 20절에 보면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고 마르다는 주님을 맞기 위하여 무덤 근처의 동네 입구까지 나갔습니다.

 

 

 

 눅 10: 38-42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르다는 행동주의 신앙인의 표본으로,

마리아는 기도와 명상주의 신앙인의 전형으로 각각 묘사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마르다와 마리아를 다 사랑하셨기에

주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부산을 떠는 마르다도, 주님 발곁에 앉아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명상과 실천이 종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토마스 머튼의 말처럼 '혁명'(revolution)은 '명상'(contemplation)과 함께 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적극적이고 행동위주의 신앙인 마르다의 모습이 본문에도 유감 없이 나타나 있습니다.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는데 마르다는 주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동구 밖까지 나갔던 것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언니 마르다의 보다 능동적인 모습이 돋보이지 않습니까?

이제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주님이 마르다와 나눈 대화의 내용인데, 여기서 잠깐 그 당시 유대 민족의 장례 풍속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기후관계로 사람이 죽으면 가능한 즉시 매장을 했습니다.

또한 한 때에는 장례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간 시절이 있었습니다.

유난히 체면을 중시했던 유대인들은 시신을 장사지내기 위하여 최고급 향품과 연고를 썼습니다.

시신은 최고급 수의를 입혔습니다. 막상 시신을 매장할 때 가장 귀한 물품들을 함께 매장했습니다.

 

 

적어도 주후 1세기 중반까지 이처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장례 풍속은 큰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유난히 체면치레를 중시했던 유대인들은 남에게 뒤지지 않는 장례식을 치르고자 한 집안의 경제가 거덜날 정도였습니다.

 

 

 

 이런 장례풍조에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한 사람은 가말리엘 2세라는 랍비였습니다.

가말리엘은 자기가 죽거든 가능하면 아주 소박한 세마포 수의로만 장사를 지내주고 사치스러운 장례를 치르지 말아달라고 유언했습니다.

그 후 장례식은 검소해져서 시신을 단순한 세마포 수의로 감싸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는 것이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장례식 때에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서 조문을 합니다.

특히 장지로 가는 장례 행렬이 있을 때 여자들이 앞장서는 풍속이 있는데, 이는 여자가 먼저 죄를 지어 죽음을 이 세상에 가져왔으므로

 조문객들을 무덤까지 안내해야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조개들은 최고의 조의를 표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장례식이 끝난 뒤 헤어질 때 조객들은

두 줄로 늘어서 유족들이 지나가도록 배려합니다. 이 때 조객들은 한가한 잡담을 유족들에게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집안에서 애도하는 기간 동안 고기를 먹거나 포도주를 마셔서는 안 되었으며 그 어떤 공부를 해서도 안되었습니다.

 

 특히 시신을 모신 자리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시신을 장지로 운구한 뒤, 모든 가구는 돌려놓아야 했으며

유족들과 조객들은 땅바닥에 앉아있거나 낮은 걸상 위에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장지에서 집으로 돌아온 뒤 대개 친구들과 가족들이 음식을 준비하는데 빵과 삶은 계란, 콩을 먹었습니다.

 둥근 계란과 콩은 항상 죽음을 향하여 굴러가는 인생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깊이 애곡하는 기간은 7일 동안 지속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처음 3일간은 크게 울어야만 했습니다. 이 7일 동안 사람들은 기름을 바른다든지,

 신발을 신는 일이나 세수를 하는 일, 공부를 하거나 사무를 보는 일 등, 일체를 할 수 없었습니다.

7일의 깊은 애곡 기간이 끝나면 30일간의 약간 가벼운 애곡 기간이 계속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를 방문하셨을 때에는 나사로가 죽은 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아직 깊이 애곡하는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이 때 조객들은 최대한 심심한 조의를 표하고 유족들과 함께 슬픔을 나누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베다니에 방문하셨을 때에는 아직 슬픔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많은 유대인들이 오라버니 나사로를 잃은 마르다와 마리아 두 자매를 위로하기 위하여 베다니 동네에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마르다와 주님이 함께 나누신 대화 내용입니다. 이 대화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신약성서 학자들은 요한복음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인공 중 한 사람을 마르다로 봅니다.

 

 

레이몬드 브라운(Raymond Brown)과 엘리자베스 쉬슬러-피오렌자(Elizabeth Schussler-Fiorenza)는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깊이 사랑하셨기에(요 11: 5) 마르다는 예수님이 가장 사랑했던 제자群에 속해야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마르다의 기독론적 신앙고백에서 그러합니다.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행한 베드로의 신앙고백(마 16: 13-20)에 비견할만한 합니다.

 

 

 자, 그렇다면 마르다와 주님 사이에 있었던 대화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이 대화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주님에 대한 마르다의 믿음이 점진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① 주님의 능력을 믿었기에 주님을 원망했던 마르다



 21절 말씀을 보세요.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이 왜 늦게 오셨느냐는 투정이 아닙니까?

"왜 우리가 오라버니가 아프다는 메시지를 보냈을 때 즉각 안 오시고 지금에서야 오셨습니까?" 하는 불평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투정과 불평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깊은 믿음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여기 우리와 함께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터인데요!"

 이것은 주님이 권능을 가지신 분이라는 확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르다는 주님이 못 고칠 질병이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던 것입니다!  

 

 

 

 ② 이미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었지만 주님이 지금 당장에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믿은 마르다



 그 다음에 22절 말씀을 보세요.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기에 일찍 오셔서 아직 살아 있는 우리 오라버니를 도우셨으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겠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오라버니가 죽었지만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과거에서 현재로 초점을 바꿉니다. "왜 과거에 주님이 늦게 오셔서 우리 오라버니가 죽게 놔두셨습니까?"

하는 탄식에서 지금 당장이라도 주님은 무엇을 하실 수 있다는 현재적 믿음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과거에 집착하여 후회하고 원망하는 믿음에서 현재적 믿음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③ 마지막 부활의 때에 오라버니 나사로가 다실 살 것을 믿은 마르다



 23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주님은 마르다의 믿음이 과거를 탓하는 믿음에서

현재적 가능성을 바라는 믿음으로 진일보한 것을 아시고 아주 간단히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나사로는 비록 죽어서 무덤에 갇혀 있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간섭하시기만 하면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마르다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24절 말씀을 보세요.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당장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 일반적인 부활이 있을 때 우리 오라버니도 다시 살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마르다의 전진적인 믿음은 여기에서 잠깐 멈추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주님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우리 오라버니가 다시 사는 문제에 관한 한 먼 훗날

온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부활이 있을 그 때에 가서야 일어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대체적으로 구약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믿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이건 악한 사람들이건 사람이 죽으면 다 똑같이 쉐올(Sheol), 즉 음부로 간다고 믿었습니다.

쉐올은 고통이 있는 지옥이 아니라 단지 어두운 그림자가 있는 곳, 즉 음부(陰部)일 뿐입니다.

시 6: 5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이와 같이 구약의 일반적인 견해는 사후에 인간 영혼은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그 영혼이 떨어져 나와 침묵과 망각의 세계로 빠져든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 불멸에 대한 믿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욥 19: 25-27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이와 같은 내세에 대한 믿음은 예수님 시대에 와서 사두개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 의해 견지되었습니다.

따라서 마르다가 내세에 대한 믿음을 피력했을 때 이 믿음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아직 부활과 생명이 되신 주님에 대한 특수한 믿음이 아니라 정통 유대인들의 믿음을 따라 장차 부활의 때에 "우리 오라버니도 살 것입니다." 하고

고백한 것뿐입니다. 이렇게 마르다의 신앙은 과거에서 현재로 또 미래로 나아갔습니다만 방향을 정확하게 잡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④ 부활과 생명의 주님되신 예수님을 참으로 믿은 마르다  


     마르다의 고백에 대해서 주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25-26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기에서 주님은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부활과 생명되신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며,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부활과 생명이 되시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다 주님을 믿기만 하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은 사람은 나사로로 상징될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

그리하여 무덤 속에 들어가 생명 없는 시체가 된 나사로와 부활과 생명이신 주님, 이 둘을 대조해보세요.

주님은 나사로를 거뜬히 살리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지금 여기 살아 있는 사람조차도 부활과 생명이 되신 주님을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 죽음의 공포가 사라지고 부활의 소망이 동터오기 때문에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느냐고 마르다에 물으셨을 때 마르다는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27절 말씀을 보세요.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주님, 제가 믿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비로소 완성에 도달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르다와 같이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로, 희미한 단계에서 더욱 분명한 단계로 전진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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