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양손잡이 사회 (201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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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1 16:37 조회3,73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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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왼손을 다쳐서 몇 바늘 꿰맨 적이 있다.
통증은 고사하고 무더운 여름 날씨에 아침저녁으로 씻는 일이 큰 고역이었다.
샤워라도 하는 날에는 왼손에 고무장갑을 끼고 위로 들어 올린 채 오른손만 움직여야 했다. 오른손잡이인지라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기는 했어도 양손을 다 쓴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치는 권헌익 교수의 책에 ‘양손잡이 사회’(ambidextrous society)라는 흥미로운 개념이 나온다.
권 교수는 이 개념을 처음 사용한 로베르 에르츠를 비판적으로 인용하되, 특히 냉전시대의 무차별 폭력으로 무참히 학살된 베트남과 한국의 우익과 좌익 인사들의 죽음에 대해 살아남은 자들의 추모의례를 통
한 화해시도에 주목한다.
좌우익 갈등 해소로 희망 찾아
에르츠는 모국어인 불어뿐 아니라 여러 언어에서 오른쪽은 ‘힘, 솜씨, 믿음, 법, 순수’ 등 긍정적 가치를 나타내는 반면, 왼쪽은 온갖 정반대의 가치를 상징하는지에 의문을 품었다.
실제로 우파는 좋은 것이고 좌파는 나쁜 것이라는 통념 때문에 우익의 죽음은 ‘좋은 죽음’, 좌익의 죽음은 ‘나쁜 죽음’으로 도덕적 위계질서를 나눈다.
한 손만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보다 두 손을 다 자유자재로 놀리는 사람이 훨씬 더 효과적인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능숙한 양손잡이로 태어날 선천적 확률은 백분의 일 정도라는 통계가 있다.
기실 중요한 것은 왼손이든 오른손이든 어느 한 손만 놀릴 경우 생리적 불구가 돼 편향적 신체를 만들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정의와 평등, 소통과 상호존중을 이상으로 삼는 사회는 오른손의 배타적 우위를 거부하고 수시로 양손을 전환 가능케 해서 두 손의 가치를 최대한 동등하게 만드는 사회일 것이다.
권 교수는 인류학자답게 이러한 양손잡이 사회의 가능성을 베트남의 두 마을과 제주도 하귀리에서의 좌익과 우익에 의해 학살된 망자들을 양쪽 사람들이 어울려 애도함으로써 극적인 화해를 이룬 사실에서 찾
는다. 친족 혹은 마을 공동체의 좌우대립을 넘어선 대동적 추모라는 문화영역에서 냉전시대 잔재인 양극적 갈등을 말끔히 씻어내는 양손잡이의 희망을 보았던 것이다.
금년은 6·25 전쟁의 정전 60주년을 맞는 해다. 아직 종전(終戰)이 되지 않은 채 일시휴전이 장장 60년씩이나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1945년 조지 오웰이 언급한 이래 너무도 친숙한 용어가 된 ‘냉전’은 대개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끝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한반도에서의 냉전은 아직까지 현재진행중이며 최근의 NLL논란이 보여주듯이 좌우의 이념적 대립과 갈등은 언제나 유령처럼 따라다닌다.
냉전문화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여태껏 한손잡이를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아마도 북쪽이 양손잡이 사회가 되는 틈을 조금이라도 내비치지 않는 한 남쪽에서의 왼편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는 계속될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에게 복이
어제는 때마침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대한 남북한 간의 첫 번째 합의문건인 7·4공동성명이 발표된 지 4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합의문을 읽어보니 지금의 시각으로 볼 때에도 꽤 급진적인 내용들이 대거 포함돼 있었다. 정치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지금 남북한의 관계는 전례 없이 경색돼 있다.
어떻게 하면 통일과 평화가 아닌 분단과 정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 한손잡이 세태로부터 남북한 모두 빠져나올 수 있을까?
진정한 냉전의 종식, 그리하여 오른손과 왼손을 모두 조화롭게 놀리는 양손잡이 사회는 성경 말씀대로 사는 데 있지 않을까.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1: 7)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마 5: 9)
통증은 고사하고 무더운 여름 날씨에 아침저녁으로 씻는 일이 큰 고역이었다.
샤워라도 하는 날에는 왼손에 고무장갑을 끼고 위로 들어 올린 채 오른손만 움직여야 했다. 오른손잡이인지라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기는 했어도 양손을 다 쓴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치는 권헌익 교수의 책에 ‘양손잡이 사회’(ambidextrous society)라는 흥미로운 개념이 나온다.
권 교수는 이 개념을 처음 사용한 로베르 에르츠를 비판적으로 인용하되, 특히 냉전시대의 무차별 폭력으로 무참히 학살된 베트남과 한국의 우익과 좌익 인사들의 죽음에 대해 살아남은 자들의 추모의례를 통
한 화해시도에 주목한다.
좌우익 갈등 해소로 희망 찾아
에르츠는 모국어인 불어뿐 아니라 여러 언어에서 오른쪽은 ‘힘, 솜씨, 믿음, 법, 순수’ 등 긍정적 가치를 나타내는 반면, 왼쪽은 온갖 정반대의 가치를 상징하는지에 의문을 품었다.
실제로 우파는 좋은 것이고 좌파는 나쁜 것이라는 통념 때문에 우익의 죽음은 ‘좋은 죽음’, 좌익의 죽음은 ‘나쁜 죽음’으로 도덕적 위계질서를 나눈다.
한 손만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보다 두 손을 다 자유자재로 놀리는 사람이 훨씬 더 효과적인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능숙한 양손잡이로 태어날 선천적 확률은 백분의 일 정도라는 통계가 있다.
기실 중요한 것은 왼손이든 오른손이든 어느 한 손만 놀릴 경우 생리적 불구가 돼 편향적 신체를 만들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정의와 평등, 소통과 상호존중을 이상으로 삼는 사회는 오른손의 배타적 우위를 거부하고 수시로 양손을 전환 가능케 해서 두 손의 가치를 최대한 동등하게 만드는 사회일 것이다.
권 교수는 인류학자답게 이러한 양손잡이 사회의 가능성을 베트남의 두 마을과 제주도 하귀리에서의 좌익과 우익에 의해 학살된 망자들을 양쪽 사람들이 어울려 애도함으로써 극적인 화해를 이룬 사실에서 찾
는다. 친족 혹은 마을 공동체의 좌우대립을 넘어선 대동적 추모라는 문화영역에서 냉전시대 잔재인 양극적 갈등을 말끔히 씻어내는 양손잡이의 희망을 보았던 것이다.
금년은 6·25 전쟁의 정전 60주년을 맞는 해다. 아직 종전(終戰)이 되지 않은 채 일시휴전이 장장 60년씩이나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1945년 조지 오웰이 언급한 이래 너무도 친숙한 용어가 된 ‘냉전’은 대개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끝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한반도에서의 냉전은 아직까지 현재진행중이며 최근의 NLL논란이 보여주듯이 좌우의 이념적 대립과 갈등은 언제나 유령처럼 따라다닌다.
냉전문화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여태껏 한손잡이를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아마도 북쪽이 양손잡이 사회가 되는 틈을 조금이라도 내비치지 않는 한 남쪽에서의 왼편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는 계속될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에게 복이
어제는 때마침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대한 남북한 간의 첫 번째 합의문건인 7·4공동성명이 발표된 지 4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합의문을 읽어보니 지금의 시각으로 볼 때에도 꽤 급진적인 내용들이 대거 포함돼 있었다. 정치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지금 남북한의 관계는 전례 없이 경색돼 있다.
어떻게 하면 통일과 평화가 아닌 분단과 정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 한손잡이 세태로부터 남북한 모두 빠져나올 수 있을까?
진정한 냉전의 종식, 그리하여 오른손과 왼손을 모두 조화롭게 놀리는 양손잡이 사회는 성경 말씀대로 사는 데 있지 않을까.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1: 7)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마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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