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시론- 평강의 왕을 기다리며 (2013.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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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1 16:39 조회3,37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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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계 유대인 프리모 레비가 쓴 아우슈비츠 생존수기 ‘이것이 인간인가’는 일본어판으로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로 번역됐다.
홀로코스트의 망령은 계속 진행 중이라는 함의가 다분히 내포된 제목이다.
곳곳서 반복되는 파괴적 광기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계몽주의적 인간애가 고양된 시대라는 유럽인들의 자부심과 달리 나치와 파시즘은 도무지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야만의 광기를 부렸다.
이러한 파괴적 광기는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아주 교묘한 가면을 쓴 채 반복되고 있다. 최근에 전개되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영유권 다툼만 해도 그렇다.
미국은 자신이 2차대전 때 전범국으로 규정한 일본과 동맹해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
중국의 팽창만 막을 수 있다면 일본이 핵무기를 보유해 군사강국으로 재무장하는 것조차 얼마든지 환영할 분위기다.
중국과 일본, 미국이 방공식별구역을 핑계로 경쟁적으로 군비 확충에 나선다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사실상 한국이 가장 큰 불안과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한반도 주변의 해양과 공중에서 연일 열강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국내 정세는 씁쓸하다 못해 한심하기만 하다.
민생 통합 약속이라는 박근혜정부의 대(對)국민 공약들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국회는 툭하면 의사일정을 중단한 채 파행으로 치닫고 있다.
보수와 진보 사이의 첨예한 증오와 대립으로 보건대 통합은 일찌감치 물 건너간 공약(空約)이 될 것처럼 보인다.
정치인들이 입버릇처럼 되뇌는 민생 챙기기는 또 어떤가. 금년에 예산이 제대로 달성되고 있는 교회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만큼 서민들의 살림이 어렵다는 말이다.
냉혹한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 낙오된 이들이 사방에 즐비하다.
한쪽에서는 먹을 것, 입을 것이 넘쳐나는 과잉세상이고 또 다른 쪽에서는 날마다 생존 자체를 걱정하며 손가락을 빠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정부나 정치인들은 말로만 민생을 외칠 뿐 서민들의 눈에는 배부른 정쟁에만 이골이 난 듯 보인다.
밖으로는 최대 강국들이 영해권과 영공권을 놓고 일촉즉발의 힘겨루기를 하고 있고, 안으로는 지긋지긋한 여야 충돌과 이념 갈등이 계속되고 있고,
도대체 힘없는 보통사람들은 어디에다 희망을 걸어야 한단 말인가.
지난 12월 초하루는 교회력이 새로 시작되는 대강절 첫 주였다. 대강절은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절기다.
안팎으로 절망의 어둠이 짙게 깔린 한 해의 끝자락에 우리는 ‘평강의 왕’(사 9:6)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려야 한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악한 현실세계에서 힘없는 평화는 생각할 수 없다.
미·중·일은 물론 한국까지 덩달아 군비 확충에 열을 올리는 것도 오직 힘만이 평화와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다는 현실인식 때문일 것이다.
힘에 의한 평화는 일시적이다
하지만 무력에 의한 평화는 항구적인 평화를 만들지 못한다. 무력은 언제나 더 큰 무력에 의해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힘에 의한 평화는 일시적일 뿐 힘의 균형이 깨지면 쉽게 허물어지기 마련인 것이다.
진정한 평화의 왕국은 강력한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가진 황제로부터 오지 않았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싹에서부터 왔다(사 11:1).
연한 싹 예수님은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절대군주가 아닌 연약한 아기로, 연한 순으로 오셨다.
하지만 그 연한 싹이 자라나 온 우주를 사랑으로 뒤덮는 거대한 숲을 이루어 온통 힘이 판치는 세상을 이겼다.
안팎에서 들려오는 온갖 어지러운 소식들 한가운데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강을 주시는 예수님을 인내와 소망 중에 기다리자.
홀로코스트의 망령은 계속 진행 중이라는 함의가 다분히 내포된 제목이다.
곳곳서 반복되는 파괴적 광기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계몽주의적 인간애가 고양된 시대라는 유럽인들의 자부심과 달리 나치와 파시즘은 도무지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야만의 광기를 부렸다.
이러한 파괴적 광기는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아주 교묘한 가면을 쓴 채 반복되고 있다. 최근에 전개되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영유권 다툼만 해도 그렇다.
미국은 자신이 2차대전 때 전범국으로 규정한 일본과 동맹해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
중국의 팽창만 막을 수 있다면 일본이 핵무기를 보유해 군사강국으로 재무장하는 것조차 얼마든지 환영할 분위기다.
중국과 일본, 미국이 방공식별구역을 핑계로 경쟁적으로 군비 확충에 나선다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사실상 한국이 가장 큰 불안과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한반도 주변의 해양과 공중에서 연일 열강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국내 정세는 씁쓸하다 못해 한심하기만 하다.
민생 통합 약속이라는 박근혜정부의 대(對)국민 공약들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국회는 툭하면 의사일정을 중단한 채 파행으로 치닫고 있다.
보수와 진보 사이의 첨예한 증오와 대립으로 보건대 통합은 일찌감치 물 건너간 공약(空約)이 될 것처럼 보인다.
정치인들이 입버릇처럼 되뇌는 민생 챙기기는 또 어떤가. 금년에 예산이 제대로 달성되고 있는 교회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만큼 서민들의 살림이 어렵다는 말이다.
냉혹한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 낙오된 이들이 사방에 즐비하다.
한쪽에서는 먹을 것, 입을 것이 넘쳐나는 과잉세상이고 또 다른 쪽에서는 날마다 생존 자체를 걱정하며 손가락을 빠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정부나 정치인들은 말로만 민생을 외칠 뿐 서민들의 눈에는 배부른 정쟁에만 이골이 난 듯 보인다.
밖으로는 최대 강국들이 영해권과 영공권을 놓고 일촉즉발의 힘겨루기를 하고 있고, 안으로는 지긋지긋한 여야 충돌과 이념 갈등이 계속되고 있고,
도대체 힘없는 보통사람들은 어디에다 희망을 걸어야 한단 말인가.
지난 12월 초하루는 교회력이 새로 시작되는 대강절 첫 주였다. 대강절은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절기다.
안팎으로 절망의 어둠이 짙게 깔린 한 해의 끝자락에 우리는 ‘평강의 왕’(사 9:6)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려야 한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악한 현실세계에서 힘없는 평화는 생각할 수 없다.
미·중·일은 물론 한국까지 덩달아 군비 확충에 열을 올리는 것도 오직 힘만이 평화와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다는 현실인식 때문일 것이다.
힘에 의한 평화는 일시적이다
하지만 무력에 의한 평화는 항구적인 평화를 만들지 못한다. 무력은 언제나 더 큰 무력에 의해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힘에 의한 평화는 일시적일 뿐 힘의 균형이 깨지면 쉽게 허물어지기 마련인 것이다.
진정한 평화의 왕국은 강력한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가진 황제로부터 오지 않았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싹에서부터 왔다(사 11:1).
연한 싹 예수님은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절대군주가 아닌 연약한 아기로, 연한 순으로 오셨다.
하지만 그 연한 싹이 자라나 온 우주를 사랑으로 뒤덮는 거대한 숲을 이루어 온통 힘이 판치는 세상을 이겼다.
안팎에서 들려오는 온갖 어지러운 소식들 한가운데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강을 주시는 예수님을 인내와 소망 중에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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