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과 사역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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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0 17:50 조회3,69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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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본질이 오염되었다는 우려가 있다. 성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이 교회 현실 속에서 변질되었다는 염려일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좋은데 교회는 싫다”는 불평이 서슴지 않고 나온다. 오늘의 교회가 복음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염 혹은 변질시켰다면 그 수위는 어느 정도일까?
더욱이 오염과 변질의 정도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생각나는 것이 ‘사업’(business)과 ‘사역’(ministry)이라는 개념이다.
사업은 속된 말로 ‘장사’에 가까울 것 같고, 사역은 점잖은 말로 ‘봉사’(奉仕) 혹은 ‘봉공’(奉公)이라 하면 좋을듯하다. 필자의 논지는 이렇다.
우리의 목회가 사업 쪽으로 기울어질수록 오염과 변질의 정도가 심하고 사역에 가까울수록 건전하다는 것이다.
교회와 관련해서 사업과 사역의 차이는 무엇일까?
첫째로, 교회의 주인이 누군가가 다르다. 사업의 주인은 당연히 사업을 시작한 당사자다. 자본을 투자하고 직원을 고용하고 경영 일체를 총지휘하는 회장 혹은 사장이 주인이다.
우리의 목회가 하나의 사업이 될 경우 겉으로는 “예수님이 주인” 운운하지만 그 실상에 있어서 사람이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기 일쑤다.
이른바 제왕적 목회가 그 경우가 아닌가. 그렇다면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예수님이 진짜 주인이 되는 목회가 사역일 것이다.
예수님이 주인이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성서의 참 뜻을 통전적으로, 그러면서도 건전하게 해석해서 개교회의 특수한 상황에 비추어 봐야할 것이고
신앙 양심 혹은 인류의 보편적 상식에 호소도 해봐야 할 것이다.
둘째로, 교회의 존립 목적이 서로 다르다.
사업적인 교회는 교회 건물의 확대나 교인수의 급증, 즉 이윤과 성장에 목을 맬 것이다. 사역이 주관심인 교회는 예수님의 뜻 혹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목적을 둘 것이다.
그러나 이 기준 역시 실제 상황에 적용하기에는 대단히 모호하고 간단치 않다. 교회를 처음 세우는 이나 목회에 종사하는 이 치고 언제나 예수님의 뜻 혹은 하나님 나라 운운하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목적에 있어서는 숭고하다 할지라도 그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관건이 될 것이다.
셋째로, 교회의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서로 다르다. 목적은 거룩하고 고상했다. 그러나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안다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수단을 쓰느냐가 사업적 목회와 사역적 목회를 가리는데 결정적일 것이다.
목적은 주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것으로 잡았는데, 그 수단은 양도둑질, 문어발식 교회 확장, 물량 공세를 통한 전도, 등의 비루한 방법을 쓴다면 어떻게 될까.
목전의 이익 앞에서 교회 역시 거룩성이나 품위를 잃고 허우적거릴 때가 적지 않다. 더욱이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경계하며 이것의 우상화를 막는데 최전위에 서야할
교회가 거꾸로 야합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결국 목적이 아무리 거룩해도 수단이 저속하다면 사업적 목회에 가깝지 사역적 목회는 아닐 것이다.
우리 시대 개신교회는 개교회주의로 인해 교회 난립을 막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가톨릭교회와 달리 너무 많은 교회가 경쟁한다.
가뜩이나 태생적 원죄를 안고 있는 인간이 극한 경쟁으로 생존권 문제까지 걱정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사역보다는 사업 쪽으로 쏠리기 쉽다.
영어 'church'는 희랍어 형용사인 ‘kuriakos,’ 즉 ‘주님의 것인,’ 혹은 ‘주님께 속한’이라는 단어로부터 파생되었다고 한다. 교회는 사람의 것이 될 수 없다.
주님이 진짜 주인이 되시는 교회, 사업에서 사역으로 가는 목회, 그런 방향 전환이 아쉽다.
그리하여 “예수는 좋은데 교회는 싫다”는 불평이 서슴지 않고 나온다. 오늘의 교회가 복음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염 혹은 변질시켰다면 그 수위는 어느 정도일까?
더욱이 오염과 변질의 정도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생각나는 것이 ‘사업’(business)과 ‘사역’(ministry)이라는 개념이다.
사업은 속된 말로 ‘장사’에 가까울 것 같고, 사역은 점잖은 말로 ‘봉사’(奉仕) 혹은 ‘봉공’(奉公)이라 하면 좋을듯하다. 필자의 논지는 이렇다.
우리의 목회가 사업 쪽으로 기울어질수록 오염과 변질의 정도가 심하고 사역에 가까울수록 건전하다는 것이다.
교회와 관련해서 사업과 사역의 차이는 무엇일까?
첫째로, 교회의 주인이 누군가가 다르다. 사업의 주인은 당연히 사업을 시작한 당사자다. 자본을 투자하고 직원을 고용하고 경영 일체를 총지휘하는 회장 혹은 사장이 주인이다.
우리의 목회가 하나의 사업이 될 경우 겉으로는 “예수님이 주인” 운운하지만 그 실상에 있어서 사람이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기 일쑤다.
이른바 제왕적 목회가 그 경우가 아닌가. 그렇다면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예수님이 진짜 주인이 되는 목회가 사역일 것이다.
예수님이 주인이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성서의 참 뜻을 통전적으로, 그러면서도 건전하게 해석해서 개교회의 특수한 상황에 비추어 봐야할 것이고
신앙 양심 혹은 인류의 보편적 상식에 호소도 해봐야 할 것이다.
둘째로, 교회의 존립 목적이 서로 다르다.
사업적인 교회는 교회 건물의 확대나 교인수의 급증, 즉 이윤과 성장에 목을 맬 것이다. 사역이 주관심인 교회는 예수님의 뜻 혹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목적을 둘 것이다.
그러나 이 기준 역시 실제 상황에 적용하기에는 대단히 모호하고 간단치 않다. 교회를 처음 세우는 이나 목회에 종사하는 이 치고 언제나 예수님의 뜻 혹은 하나님 나라 운운하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목적에 있어서는 숭고하다 할지라도 그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관건이 될 것이다.
셋째로, 교회의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서로 다르다. 목적은 거룩하고 고상했다. 그러나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안다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수단을 쓰느냐가 사업적 목회와 사역적 목회를 가리는데 결정적일 것이다.
목적은 주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것으로 잡았는데, 그 수단은 양도둑질, 문어발식 교회 확장, 물량 공세를 통한 전도, 등의 비루한 방법을 쓴다면 어떻게 될까.
목전의 이익 앞에서 교회 역시 거룩성이나 품위를 잃고 허우적거릴 때가 적지 않다. 더욱이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경계하며 이것의 우상화를 막는데 최전위에 서야할
교회가 거꾸로 야합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결국 목적이 아무리 거룩해도 수단이 저속하다면 사업적 목회에 가깝지 사역적 목회는 아닐 것이다.
우리 시대 개신교회는 개교회주의로 인해 교회 난립을 막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가톨릭교회와 달리 너무 많은 교회가 경쟁한다.
가뜩이나 태생적 원죄를 안고 있는 인간이 극한 경쟁으로 생존권 문제까지 걱정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사역보다는 사업 쪽으로 쏠리기 쉽다.
영어 'church'는 희랍어 형용사인 ‘kuriakos,’ 즉 ‘주님의 것인,’ 혹은 ‘주님께 속한’이라는 단어로부터 파생되었다고 한다. 교회는 사람의 것이 될 수 없다.
주님이 진짜 주인이 되시는 교회, 사업에서 사역으로 가는 목회, 그런 방향 전환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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