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촌총화

국민일보 칼럼 바이블 시론- 정주에서 탈주로 (201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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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1 16:10 조회3,5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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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컴퓨터 앞에서 책을 읽으며 뭔가 끼적거린다.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다. 자판기 옆에는 스마트 폰이 있다. 인터넷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음악도 듣고 카카오 톡도 한다.

툭툭 치고 쓱쓱 문지르며 수많은 영토를 뛰어 넘어 잽싸게 이동한다. 아사다 아키라가 말하는 ‘스키조 키즈’, ‘분열증 아이’의 출현은 새삼스럽지가 않다.



 근대 자본주의는 파라노이아, 편집증적이었다.

멈추지 않고 돈을 벌었다. 재산을 산더미처럼 쌓고 끝없이 자신의 영토를 구축했다.

근대 문명은 이런 편집증적 추진력에 의해서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왔다. 편집증형 인간은 영토화와 재영토화를 반복하며 영토의 확대에 주력한다.

그러다가 결국은 고정된 체제, 즉 자신이 확보한 영토 안에 정주한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축적하는 일은 언제나 버겁고 영토를 지켜내는 일은 더더욱 힘들다.



 질 들뢰즈와 아사다는 편집증형 시대가 물러가고 스키조프레니아, 분열증형 시대가 왔다고 본다. 아이들을 보라.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도망친다.

중심으로 집중하지 않고 수많은 대상들을 향하여 분산한다. 금방 산만해지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휴대폰과 인터넷으로 영토를 무너뜨리고 자유자재로 경계를 넘나든다.

끊임없이 탈영토화를 꿈꾼다. 물론 분열형 인간은 안정된 체제 중심에서 자꾸만 바깥으로 튕겨나가려고 하기에 불안하다. 통일성도 없다.

그럼에도 편집적 정주에서 분열적 탈주에로의 전환은 부인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대세다.



  대형교회 주변의 잡음, 교단장 선거 후의 내홍, 등등으로 우리 교회의 민낯에 이따금씩 따가운 시선이 쏠린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탈주를 모르는 정주가 문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동안 우리는 지나치게 편집증적이었다. 긁어모으고 또 모았다.

천 명을 가진 교회는 이천 명, 삼천 명을 부르짖었다. 편집증적 열정과 집착이 초고속 성장을 불러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입으로는 천국 시민을 외쳤지만 이 세상이 전부인양 축적하고 확장하는 영토화와 재영토화를 반복해 왔다.

그러는 사이에 교회는 이제 성장하는 것도 어렵지만 지켜내야만 할 영토들도 버겁게 됐다. 영토화할 수 없는 것을 영토화하는, 정주하는 교회가 걸리는 덫이다.



  탈주는 ‘유목주의’와 연결된다. 정주하는 농경민과 달리 유목민은 목초지를 따라 끝없이 떠다닌다.

물론 정주민도 이동하지만 잠시 멈추기 위해, 또 다른 재영토화를 위해 탈영토화를 시도할 뿐이다. 유목민은 아예 영토화와 재영토화를 거부하기 위해 탈영토화, 탈주한다.

탈주는 현실의 안정을 외면하는 도피가 아니다. 현실의 파괴나 현실로부터의 단절과 소외도 아니다. 탈주는 언제나 새로운 가치와 질서의 창조를 겨냥한다. 


 모세와 출애굽 백성들의 이야기는 유목민, 탈주, 탈영토화 스토리다. 엑서더스는 탈주기다. 모세야말로 태어나서 죽기까지 탈주를 거듭했다.

 그의 신비한 죽음이야말로 탈주와 탈영토화의 극점이었다. 고정된 체제에 정주할 때 우상숭배는 피할 수 없다.

실제로 가나안 땅에 정주하는 순간부터 오염과 변질, 타락의 지루한 악순환이 시작되지 않았던가!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을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낸 간첩이라고 했다.

 하늘과 땅 두 세상의 긴장 속에 살지만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면밀히 정탐하여 자신을 밀파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할 ‘거룩한 밀정’이다. 정주자가 아닌 탈주자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히 11:13)

김흥규목사<내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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