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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시론- 자살은 안돼요! (201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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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1 16:27 조회3,4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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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어거스틴은 ‘신국론’에서 자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로마의 귀부인 루크레티아는 성폭행당한 뒤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결했다. “두 사람이 있었지만 간음을 저지른 것은 한 사람뿐이다.”

한 사람은 폭력으로 정조를 유린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몸은 빼앗겼으나 정신이 동조하지 않았으므로 순결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크레티아는 죄 없는 자신을 죽였기에 살인자이며, 사람들이 그녀를 고매한 절개의 여인으로 칭송하는 것은 잘못이다.



혹여 남자가 노골적으로 겁탈해오자 여자 쪽에서 은근히 못이기는 척 동조해 간통을 저질렀다 해도 여전히 딜레마에 빠진다.

살인죄를 면하면 간통 혐의로, 간통죄를 면하면 살인 혐의를 받게 된다. 결국 간부라면 절개가 굳은 여인으로 칭송받을 수 없고, 열녀라면 무죄한 자신을 죽인 살인죄를 벗을 수 없다.



제6계명 대상엔 자신도 포함



 물론 어거스틴은 루크레티아가 간부가 아니라 명예를 지키고자 자진(自盡)했다고 보았으나, 그럼에도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어긴 것으로 보았다.

이 계명은 다른 계명과 달리 ‘이웃’이라는 단서를 달지 않으므로 타인은 물론이고 자신도 포함한다.

삼손과 같이 성령의 은밀한 음성을 들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수치나 역경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죄악이다.



어거스틴은 자살이 혐오스러운 죄악임을 분명히 하며, 구원을 얻는 회개의 여지가 전혀 없을 자살죄를 짓느니 차라리 회개해 용서받을 수 있는 파렴치를 범하는 게 더 낫다고도 했다.



세계적인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매료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가 브라질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도중 부인과 함께 음독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았다.

최진실씨가 간 뒤 전 남편인 조성민씨마저 그렇게 갔을 때에는 뭔지 모를 막막한 슬픔이 아려 왔다.

그 혼자만 살아남았을 때 나 역시 이러쿵저러쿵 가십을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역시 외로웠고 피해자였다. 이렇게 자살은 가족을 비롯한 주변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남긴다.



2011년 우리나라 자살자 수는 1만5906명, 하루 평균 44명이다.

OECD 자살률 1위는 물론이고 세계 1위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정도로 심각하다. 80% 이상이 우울증과 관계가 있다고 하나 충동형, 도피형, 생계형 자살에 이르기까지 그 동기는 참으로 다양하다.



어느 죽음인들 사연 없고 슬픔 없는 죽음이 있으랴만 어떤 경우에도 자살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럼에도 자살자나 유족들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정죄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천국에 갔을까, 지옥에 갔을까 논쟁을 벌이는 것 역시 잔인한 일이다.

하물며 장례식의 거부는 또 한번 유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행위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장례식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자를 위한 위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망권세에 굴복하는 것일 뿐



 성경을 보면 아비멜렉, 삼손, 사울, 아히도벨, 시므리, 가룟 유다 등이 자살했다.

어떤 이유로 죽었든 자살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 쥐고 계신 생명주권을 침탈하는 죄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이미 이겨놓으신 사망권세에 스스로 굴복하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사역을 헛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욥의 경우 재산을 다 잃었고 10남매가 비명횡사했고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웠지만 자살하지 않았다.

감당 못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자살충동을 느꼈던 엘리야도 이 위기를 잘 극복했다.

하물며 예수님은 스스로 온갖 모진 치욕과 시련을 다 견뎌내셨을 뿐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자살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았다.



자살은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릴 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 결단코 아니다. 자살은 안 된다. 이를 악물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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