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불완전한 교회를 위한 변명(2013.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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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1 16:32 조회3,47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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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를 놓고 볼 때 지금처럼 교회가 욕을 얻어먹는 때가 없었던 것 같다.
옛날에는 인터넷과 같은 정보통신이 발달되지 않았으므로 별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즈음 우리는 각종 SNS 매체를 통해 교회의 실수와 치부를 폭로하고 공격하는 기사를 흔히 볼 수 있다.
외부의 공격은 내부의 인내와 단결을 불러오지만 개혁의 이름으로 쏟아내는 내부의 비판은 비수를 꽂듯이 때로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교회에 쏟아지는 비판들
“그들이 조금만 더 구원받은 사람들처럼 보인다면 나도 그들의 구원을 믿겠소.” 니체의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발꿈치도 못 따라가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예수는 좋은데 예수쟁이들은 싫다.”
“예수여, 당신의 추종자들로부터 우리를 구하소서!” 사람들은 이런 유의 고전적 조소와 더불어 다양한 현실적 비판을 일부 대형화된 교회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 거의 일방적으로 퍼붓는 때가 있다.
물론 교회는 이런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고 끝없이 자기성찰을 해야 마땅하다.
무엇보다도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처럼 승천하신 후 우리와 함께 육체적으로 계시지 않는 예수님이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들 속에 위장된 모습으로 계신다는
사실을 분별해야 한다(마 25: 31∼46). 테레사 수녀의 말대로 예수님이 어떤 ‘지극히 작은 이웃’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계신지 교회가 찾아나서야 함에도 그렇게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그리하여 까딱 잘못하다가는 가장 화려하고 힘 있는 교회야말로 예수님의 뜻을 가장 조직적으로 왜곡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지만 불완전한 교회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교회는 결코 완전한 의인들의 모임이 아니다. 루터의 말대로 “의인이면서 죄인이고, 죄인이면서 의인”인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사람들의 혼합체인 까닭에 실수와 오류가 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 마녀재판, 나치 정권에의 부역,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등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잘못을 저질러왔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교회’나 완전할 뿐 역사 속의 ‘보이는 교회’는 언제나 공과(功過)를 함께 품고 있다.
누군가 한 가시적 교회에 속한다고 해서 저절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유능한 목사의 설교나 예전, 교리, 제도, 봉사 때문에 거룩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주를 품고 있기 때문에 거룩해질 뿐이다.
“개혁된 교회도 항상 개혁될 필요가 있다”는 말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참 정신을 바르게 계승하고 있는지 끝없이 반문하며 자신을 채찍질해나가야 한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성금요일 아침에 교회를 생각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강함이 아니라 약함으로, 무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자신을 재규정하셨다.
그리하여 가장 끔찍한 형틀인 십자가가 가장 놀라운 하나님 사랑의 결정판이 됐다.
얀시의 말대로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상처를 품었듯이 그의 몸 된 교회의 상처도 품으실 것이다.
가정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버리지 않듯 하나님은 상처투성이의 교회도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
낮은 자 높이는 공동체돼야
예수님은 사흘 후에 부활하셨다.
40일 정도 제자들 곁에 머무르시던 예수님은 승천하셨고 오순절 날 성령이 내려와 교회가 생겼다.
이제 예수님은 교회를 당신의 새 몸으로 삼아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기에 주님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 세워진 교회는 새로운 성육신의 신비 속에 있다.
예수께서 그랬듯 교회도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추는 크고도 작은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성금요일과 토요일에 머무르지 말고 찬란한 부활의 아침을 향해 전진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젠가 그분과 함께 웃을 수 있도록 오늘 우리와 함께 우신다.”(몰트만)
옛날에는 인터넷과 같은 정보통신이 발달되지 않았으므로 별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즈음 우리는 각종 SNS 매체를 통해 교회의 실수와 치부를 폭로하고 공격하는 기사를 흔히 볼 수 있다.
외부의 공격은 내부의 인내와 단결을 불러오지만 개혁의 이름으로 쏟아내는 내부의 비판은 비수를 꽂듯이 때로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교회에 쏟아지는 비판들
“그들이 조금만 더 구원받은 사람들처럼 보인다면 나도 그들의 구원을 믿겠소.” 니체의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발꿈치도 못 따라가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예수는 좋은데 예수쟁이들은 싫다.”
“예수여, 당신의 추종자들로부터 우리를 구하소서!” 사람들은 이런 유의 고전적 조소와 더불어 다양한 현실적 비판을 일부 대형화된 교회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 거의 일방적으로 퍼붓는 때가 있다.
물론 교회는 이런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고 끝없이 자기성찰을 해야 마땅하다.
무엇보다도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처럼 승천하신 후 우리와 함께 육체적으로 계시지 않는 예수님이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들 속에 위장된 모습으로 계신다는
사실을 분별해야 한다(마 25: 31∼46). 테레사 수녀의 말대로 예수님이 어떤 ‘지극히 작은 이웃’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계신지 교회가 찾아나서야 함에도 그렇게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그리하여 까딱 잘못하다가는 가장 화려하고 힘 있는 교회야말로 예수님의 뜻을 가장 조직적으로 왜곡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지만 불완전한 교회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교회는 결코 완전한 의인들의 모임이 아니다. 루터의 말대로 “의인이면서 죄인이고, 죄인이면서 의인”인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사람들의 혼합체인 까닭에 실수와 오류가 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 마녀재판, 나치 정권에의 부역,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등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잘못을 저질러왔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교회’나 완전할 뿐 역사 속의 ‘보이는 교회’는 언제나 공과(功過)를 함께 품고 있다.
누군가 한 가시적 교회에 속한다고 해서 저절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유능한 목사의 설교나 예전, 교리, 제도, 봉사 때문에 거룩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주를 품고 있기 때문에 거룩해질 뿐이다.
“개혁된 교회도 항상 개혁될 필요가 있다”는 말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참 정신을 바르게 계승하고 있는지 끝없이 반문하며 자신을 채찍질해나가야 한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성금요일 아침에 교회를 생각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강함이 아니라 약함으로, 무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자신을 재규정하셨다.
그리하여 가장 끔찍한 형틀인 십자가가 가장 놀라운 하나님 사랑의 결정판이 됐다.
얀시의 말대로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상처를 품었듯이 그의 몸 된 교회의 상처도 품으실 것이다.
가정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버리지 않듯 하나님은 상처투성이의 교회도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
낮은 자 높이는 공동체돼야
예수님은 사흘 후에 부활하셨다.
40일 정도 제자들 곁에 머무르시던 예수님은 승천하셨고 오순절 날 성령이 내려와 교회가 생겼다.
이제 예수님은 교회를 당신의 새 몸으로 삼아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기에 주님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 세워진 교회는 새로운 성육신의 신비 속에 있다.
예수께서 그랬듯 교회도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추는 크고도 작은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성금요일과 토요일에 머무르지 말고 찬란한 부활의 아침을 향해 전진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젠가 그분과 함께 웃을 수 있도록 오늘 우리와 함께 우신다.”(몰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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